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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2/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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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사랑을 배운 적이 있는가?
당신은 사랑을 배운 적이 있는가?
- 에이즈 공포증은 참자아를 발견할 가장 최적의 시기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관념, 즉 의심받지 않고 수용되는 상식적인 관념 중에는 희한한 게 많다. 그 중 하나가 자신이 배우지 않은 것은 앞으로도 배울 가치가 없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자신이 희생한 만큼 보상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희한한 생각이 절묘하게 결합된 것이 한국 사회 부자의 평균적인 의식이다. IMF 이후 사회적 소외인에 대한 부자들의 기부금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러한 축소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것이 지하철에 설치된 불우이웃 돕기 상자이다. 지난해 겨울 내내 강남과 강북의 지하철역에서 집계된 금액은 강북이 강남을 앞질렀다. 이를 통해 내릴 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 강남에 거주하는 사람은 노숙자 등 빈민에 대한 불신감이 크다.
○ 이러한 불신감의 근원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적이 없는 생활 환경에 있다.
○ 따라서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의 진정한 의미, 사랑을 모른다.
○ 강북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에 대한 동정과 애정을 갖고 있다.
○ 이러한 호감의 근원은 경제적 어려움과 동시에 인간 신뢰에 근거한 생활환경에 있다.
○ 따라서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의 진정한 의미, 사랑을 배우고 있으며 실현한다.
아울러 강남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희한한 논리는 보다 희한하고 천박한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
○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노력을 했기 때문에 경제적 혜택을 받고 있다.
○ 이러한 우리의 노력은 사회적으로 보상받은 것이므로 침해받을 수 없다.
○ 또한 우리는 사회지도층으로서 빈자를 돕지 않는 것의 진정한 목적은 그들 자신이 어리석음과 게으름을 포기하고 스스로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는 갱생을 유도하는 것이다.
취지는 상당히 좋다. 문제는 내용임에 불구하고 굶주리는 사람은 늘어만 가고, 이로 인해 자살하고 서서히 말라 죽어가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팔짱만 낀 채 불우이웃 돕기 캠페인을 비웃으며 지나가는 멋쟁이 강남의 주민들. 이 글이 신자유주의를 다룰 목적이었다면 강남으로 대표되는 부자의 허위의식을 철저하게 파헤치련만, 불행히도 지금은 에이즈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다.
앞서 이야기한 바대로 우리들 중 많은 이가 가정과 학교, 직장 등 사회조직 어디에서도 배우지 못한 게 있다. 사랑이 그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우리는 왜 단 한 번도 사랑이 뭔지 배운 적이 없을까?
학교에서는 사랑을 가정에서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건 부모만이 가장 훌륭한 사랑의 교사이기 때문이라고 애둘러 변명된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학교는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하지만 인간에게는 불필요한 지식을 머리 속에 넣어주는 기관이지 사랑이 뭔지 가르쳐 줄 능력이 없다.
그렇다면, 부모에게는 그럴 능력이 있을까? 그렇게 믿고 싶겠지만 사실 부모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고, 원래 능력은 있다고 할 지라도 이 능력을 발견하고 개발하고 아이에게 베풀 시간 및 정신적 여유가 없다. 대부분의 부모에게는 경제적 능력조차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한 아이의 부모가 될 사람들, 즉 우리들은 가정과 학교, 군대, 직장 생활 어디에서도 사랑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잘해봤자 공부 잘 하고 품행이 방정하여 말썽 부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게 사랑의 전부인 줄 알았을 뿐이며, 청소년 시절에는 '사랑이 뭐고 인생이 뭘까?'를 고민해봤자 이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우리 모두 비슷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청년들을 모아놓고 변증법적인 대화를 통해 사랑과 인생의 참된 의미를 가르쳐주려고 했던 것인데, 그 대가로 사형을 선고받고 말았다.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가르쳐준다는 것은 반국가적이며, 이 사회에서 원치 않는 행위다. 자유 학교 혹은 대안학교라고 불리는 새로운 체계의 교육이 현 행정당국의 방해로 침체되고 있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고민은 고민으로 묻혀 버리고, 침묵을 금으로 알며, 도덕군자인양 포커 페이스를 하는 게 예의라고 믿으며 살아 온 우리가 부모가 된들 우리의 자식들이 궁금해하는 사랑의 의미를 가르쳐 줄 능력이 갑자기 생길 수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좌절감으로 의식을 프로그램화한 우리가 아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 더 좋으련만.
따라서 부모가 의존하는 것은 아이를 억압하는 것이며, 종종 사랑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한다. 집에서는 사랑의 매, 학교에서는 교편이라고 하는 막대기에 휘둘리는 아이들. 이걸 보고 배웠으며, 자신이 맞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거나 불평조차 하지 못한 우리가 어떻게 사랑의 진정한 의미인 <도전과 행동, 신뢰와 일치, 배려와 애타심>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배운 건 부자의 자식은 부자답게 사는 방법, 즉 경쟁심과 탐욕을, 가난한 노동자의 자식은 부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방법이었지 무조건적 사랑이 아니었다.
단지, 전자보다 후자가 인간답게 보이며, 아무리 노력해도 부자가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을 때 자신의 옆에 가난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걸 느끼고 동정심을 베푸는 것이다. 그러나 이 동정심은 자신에 대한 동정심이기도 하다. 자신을 동정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남도 동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고통을 통해 배우고 베품을 통해 실현하는 것이다. 물론, 생득적으로 체험될 수 있다. 어머니가 아이를 잉태하는 것처럼. 하지만 아이를 잉태하는 것조차 사랑의 행위라고 볼 수는 없다. 실수로 잉태할 수 있으며, 이 경우 아이는 죽여야 하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사랑의 전도사임을 자처하는 YMCA 아줌마 중 대부분이 낙태를 한 경험이 있다는 어떤 조사 발표가 이를 증명한다. 이건 아이러니한 현상이 아니다. 낙태를 한 끔찍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낙태를 반대하는 것이다.
생득적으로 타고났다고 할 지라도 사회에 존재하는 이상 인간은 1분 1초도 쉬지 않고 사회화되고 있기 때문에 사랑이 뭔지 가르쳐주지 않으면 배움의 기회를 잃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복종과 침묵이 사랑이라고 가르쳐준다면 그게 전부일 줄 알게 된다. 실제로 가정에서도 그렇게 배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이유는 내면적 자유로움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반항이라고 부른다. 반항은 상당히 좋은 의미다. 고상하게 말하자면 불복종 시민의식이다. 그렇기에 인지학자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불우한 가정 환경에서 나고 자란 아이는 유복하고 평안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보다 더 민주적이며 폭력을 혐오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당신이 다른 사람의 내면을 진심으로 느낄 수 있으며, 폭력을 혐오하고 있다면 그건 자신의 성장과정이 좀 고생스러웠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가정과 사회의 부조리가 내면적 자유로움을 자극하고 성장시켰던 것이다. 반면, 지금 성격이 외향적이라면 그것은 타고난 성격이라기보다는 자신의 가치를 남에게서 인정받으려는 의존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부분의 에이즈 공포증자는 바로 이 내면적 자유로움을 가진, 양심적이고 폭력을 혐오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 그래서 에이즈 공포증자들끼리 서로 잘 공감하는 것은 각자 삶의 내력까지 이미 무의식적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봐도 괜찮을 것이다. 물론, 조건부로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며, 이 조건 하에서 자기도 인정받고 사랑 받을 것을 요구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이제 중요한 걸 함께 이야기해보자. 에이즈 공포를 가진 이 시점은 당신이 사랑을 배울 아주 중요한 바로 그 시점이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이 희망이 과학적 진실과 치열한 고민 속에서만 드러난다는 걸 직시해야 한다. 위기는 기회이며, 위기를 컨트롤할 수 있는 자기 통제는 오직 선택의 결과에 달려 있다. 아무리 다양한 선택 조건이 있다고 할 지라도 모든 선택은 단 두 가지 전제를 갖는다. 파괴와 절망이냐! 사랑과 생명이냐!
이 세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는지 알아야 하며, 엄격한 사회적 통제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존재하며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이 이 모든 재앙의 시발점이란 것까지 공부하면 더욱 좋다.
다행스럽게도 에이즈 가설이 빚어낸 지옥은 사랑이 뭔지 가르쳐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교과서이다. 배가 고플 때 밥이 먹고 싶은 것과 같이 지옥 속에 살 때만이 그 동안 자신을 옮죄어왔던 지옥의 사슬을 풀어내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카를 융의 제자인 에번스는 [암의 심리학적 고찰]에서 아주 명확한 정리를 한 적이 있다.
"대개의 병이 다 그렇듯이 암도 환자의 삶에서 어떤 일이 잘못되어간다는 상징이자 다른 길을 택하라는 경고다." 그런데 에이즈 공포증자는 암 선고를 받기 전의, 받은 후의 암 환자 심리상태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우리는 과학적 대안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 대안이 있는 곳까지 오고 말고는 순전히 당신의 마음에 달렸다. '에이즈 공포증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어떤 희생을 겪어도 좋다.'고 말하던 사람들 중 단 1%도 못 미치는 사람만이 우리의 말에 귀기울였다. 이 글을 읽고 뭔가를 느낄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하지만 그럼에도 에이즈 공포증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단지 느낌만 알고 있었던 참사랑을 배울 진정으로 의미있는 교육과정이다.
믿기 힘들어도 믿어야 한다. 자기 안의 진정한 자신을 만나야 하며, 단지 그 뿐이다. 사랑은 자신의 힘을 믿고 진리를 존중할 때 일어나는 고결한 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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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를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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