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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29(수)
섹스를 다시 생각해본다  

섹스를 다시 생각해본다

미친 듯이 크게 말하고, 즐겁게 노래하고, 오직 한 가지에만 집중하면 예뻐지고, 행복해지는  삶의 방법이 있다고 한다. 과연 무엇일까? 지난 해 큰 선풍을 일으킨 ‘미친 영어’의 공부하는 방법이기도 했던 이것은 놀랍게도 섹스다.

나는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한국 시리즈 6차전 경기를 보고 있는데, 지금 막 SK팀 타자의 투런 홈런 공을 잡은 청년이 아주 행복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관중들의 함성소리가 들린다. 이걸 보면 야구도 섹스에 못지 않은 멋있는 삶의 방법 같기도 하다.

이와 같이 오르가즘을 느끼는 방법은 다르지만 ‘지금 이 순간 내가 혼자가 아니다’는 동일한 공통점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삶을 즐겁게 느끼는 방법은 다양한 것 같다. 성 컬럼리스트인 이명구 씨는 섹스에 대해 “개인적인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는데, 그 개인이란 아무리 좁게 보아도 두 명 이상을 의미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때 개인은 자아를 넘어서 여기에 있는 ‘우리’를 가리킬 것이다.

단순히 말 장난을 하자는 게 아니다. 이 세상을 야만과 폭력으로 얼룩진 곳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 찬 곳으로 볼 것인가를 구분해보자는 것이니까. 생각해 볼 만한 묘미가 있지 않는가. 우리가 행복해 지려는데, 이러한 행복에 한 획을 긋는 행위가 섹스라면!


서갑숙 씨의 득도

99년이었을 것이다. 그 해 최대의 화제는 단연코 서갑숙이라는 이름, 아니 이름이라기보다는 북한 노동당 서열 23위의 김철수 혹은 미국의 존 로드와 같은 코드 네임으로 더 잘 알려진 연예인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종종 ‘포르노’와 동일시되었는데, 그 이유는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이하 주인공)]를 쓴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수많은 화제를 불러 일으켰고, ‘19세 미만 구복 불가’라는 붉은 딱지가 붙여져서 절찬리에 판매되었다. 당시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다. 다만, 여성의 인권 향상을 소원하는 사람 중 한 명으로서 서갑숙 씨에게 동정심을 품고, 그녀에 대한 언론의 냉소적이면서도 낯 뜨거운 마녀사냥을 경멸했다.

그런데 어제 친구의 서제에 이 책이 꽂혀 있는 걸 발견하고는, 밤을 새워서 한 자 한 자 글을 음미하며 호기심을 충족시켰다. 역시!

이 책을 통해 내가 서갑숙 씨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4년 전 내가 그녀에게 품었던 동정심은 정말로 멍청한 마음이었다. 사실 그녀는 사랑의 쟌다르크였다. 위선적인 청교도인인 영국(우리 사회)의 공격으로부터 위태로운 조국(사랑)을 구하기 위해 용감하게 칼을 잡은(책을 쓴) 사람이었던 것이다.

쟌다르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서갑숙 씨는 프랑스 왕으로부터(시민사회단체) 지원을 받지 못했던 점 뿐이다. 개혁과 멀티 오르가즘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진보진영도 성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있었다. 급진적 여성 운동을 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자본가보다 더 보수적이고 이중적인 성적 가치관을 가졌다보니.

그런데 그녀는 개인에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을 맞이할 수 있는 ‘주인공’을 출간했다. 인세 로 한 몫 벌고 또 포르노계에 화려하게 등장하기 위한 수순이 아니었다. 어쩌면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고 느낀 순간이 있을 지도 모를 혹독한 시기를 아주 순수하게 용기 그 자체로 맞섰던 게 뒤늦게라도 증명한다. 순진하게도 우리는 서갑숙 씨를 오해했다. 그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겨우 이것 뿐이었다.

“성과 사랑의 혼돈 속에서 나는 이제서야 겨우 실마리 하나를 잡았다. ‘삶의 클라이맥스는 ’사랑‘이라고 이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서갑숙 씨는 순전히 개인적인 방법으로 득도를 했던 셈이다. 하지만 서갑숙 씨의 득도는 남다르다. 자신이 어떤 과정을 거쳐, 득도를 했는지 자세하게 설명한다. 이렇게 보자면, 그녀의 득도는 선종의 스님이 득도하는 방식과 다를 게 전혀 없다.

전자는 ‘섹스’에 더 큰 비중을 두었고, 후자는 ‘선문답’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사랑이 무엇인가’를 말한다. 따지고 보면, 개혁이나 혁명을 통한 집단적 의식의 변화 없는 한 깨달음은 지극히 개인적일 수밖에 없으며 저마다 깨달은 바가 다르기에 설명하는 방법도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스님이 나무로 만든 부처를 불태우고 똥막대기를 들 때, 전두환에 맞서 광주 시민들은 총을 들었던 것처럼.


섹스란 무엇일까?

‘주인공’을 추천한 문화 평론가 김지룡 씨는 추천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부끄럽지만, 내 자신도 20대 시절에는 죽기 전까지 100명의 여자와 성관계를 맺겠다고 다짐했을 정도로 저질이었다.”

100명이라! 그가 캐나다에서 태어나 교육받은 사람이었다면 1-2년 안에 충분히 실현할 수 있는 그런 수준이다. 한국에 와서 영어를 가르친 20대 캐나다인은 300명이 넘는 한국인 여자와 잠을 같이 자는데 불과 2년이 걸렸다. 또 프랑스에서 태어났다면 목표를 1,000명으로 잡아도 실현 가능하다. 10년 동안 1,000명의 여자와 성관계를 맺었다는 프랑스 남자에 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혹은 결혼을 3번 정도 해야겠다고 마음 먹을 수 있다. 중국의 위구르족은 살아 생전 평균 3번 결혼을 한다.

이처럼 섹스란 ‘횟수’다.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는. 그리고 섹스와 사랑을 노이로제 걸린 사람이 눈꺼풀을 떨 듯이 구분한다. 이 중에는 ‘플라토닉한 사랑’이라는 단어도 있다. 문제는 플라톤이 정신적 사랑에 대해 ‘좋다, 싫다’식으로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무 상관도 없는 유명한 철학자의 이름을 빌려서라도 사랑의 정의를 규정할 정도로 속이 좁은 이 사회에서 섹스는 금기다. 오죽했으면 서갑숙 씨가 이렇게 말했을까.

“우리는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을 마음 속에 담아 두고 산다. 그런 것들이 쌓이고 또 쌓여 금기가 되고 그 금기가 다시 억압으로 돌아와 우리를 옥죄고 있다. 나는 이야기하고 싶다. 누군가를 만나 밥을 먹고 차를 마시듯 그렇게 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서갑숙 씨가 정말로 사랑의 실마리를 잡았다고 믿고 있다. ‘주인공’에서 펼쳐진 논리가 지성이 아니라 직관에 의해, 슬픔과 두려움에 의한 것이 아니라 기쁨과 행복으로, 변덕스럽고 거짓된 에고가 아닌 이 모든 것보다 더 큰 존재로서, 마지막으로 사랑을 추상적인 개념이 아닌 실제적인 에너지라는 걸 증명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면 깊숙이 있는 인간의 본질을 보고, 만지고, 실현한 사람만의 소통방식이다. 그렇기에 서갑숙 씨에게 섹스는 사랑을 실현하는 무수한 방법 중 가장 강력한 방법 중 하나일 뿐이었다.

이제 섹스에 대한 순전히 개인적인 정의를 함께 이야기해볼까 한다. 오랫동안 곰곰히 생각해보건대, 섹스는 ‘사랑이라고 불리는 실제적인 에너지를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방법을 통해 가장 적극적으로 주고 받는 우주적인 이해방식’인 것 같다.

말하자면, 섹스는 설득하기 위해 구차하게 긴 말을 안 해도 눈빛만 보고도 마음을 여는 능동적인 이해심이며, 이와 함께 자신과 상대의 육체와 정신을 배려하며 칭찬하고 또한 상처를 감싸 안아주어 치유를 하는 적극적인 치료 행위이자, 우리 몸과 마음에 갇혀 있는 에너지를 풀어서 마침내 침대의 한계를 넘어 자기 안의 신과 접촉하면서 행복을 창조하고 간직하는 사랑의 표현방식이다.

그러한 바 서갑숙 씨가 멀티 오르가즘을 강조했던 것은 우리 안의 에너지를 풀어내는 방법에 대해 경험적으로 설명한 것이며, 객관적으로 대중에게 제공할 수 있는 섹스에 대한 최상의 정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서갑숙 씨의 주장에 대해 비정상적으로 호들갑을 떨었던가. 오늘날 만연한 괴이한 성 풍속도를 보며 나는 불안에서 원인을 찾는다. 아무리 덜 심리학적이라도 불안은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또 두려움은 고통과 질병을 낳는다. 심인성 질환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고통과 질병은 우리의 관점이 과거와 미래에 묶여있기에 생기는 것이다. 맨날 과거 속의 그 미친 놈을 저주하고 어떤 상황에 대해 분노하면서, 자존심과 피해의식, 죄책감으로 가득 찬 삶이기에 미래를 생각하면 불안하기 짝이 없는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은 한 두 명이 아니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 현재를 느낄 수 없기에 섹스 역시 폭력과 이기, 무기력으로 치닫는다고 유추할 수 있지 않는가. 요즘 절에서 하는 명상이 인기인데, 그 명상은 내관법으로서 현재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객관적으로 직시하는 수련이다. 이만큼 우리는 현재를 인식하는데 미숙하다.


대안이 있을까?

섹스를 통해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내가 생각할 땐 없다. 하지만 사랑함으로서 행복하는 방법은 있을까?

극단적으로 본다면, 시중 대형서점에 깔린 책들이 모두 그 사랑의 행복을 실현하는 방법에 관한 책이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겠다는 사람의 마음도 사랑의 실천이고, 파인만이라는 물리학자는 물리학을 얼마나 사랑했던지 일반 대중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을 펴냈다. 그리고 서갑숙 씨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섹스를 통해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 서로 일치되는 삶(기쁨 등)을 공유할 수 있음을 자기 삶을 통해 알리고자 했다.

이러한 대안들은 잊혀진 과거의 유산이기도 하다. 인도에서는 섹스를 통해 신과 일치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카마수트라나 중국의 양생법도 하나같이 섹스를 통해 젊음과 건강을 최대한 길게 영속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친다. 과거에는 분명히 이렇게 가르쳤다. ‘사랑하는 감정을 느끼며 그대의 사랑을 표현하라.’ 여기에는 무한한 인내가 포함된다.

그렇기에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이 섹스를 사고 파는 매춘이었고, 오늘날에도 가장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매춘이라고 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하기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야말로 사랑일 것이다. ‘주인공’을 쓴 이유로 ‘미친 년’ 소리를 들어야만 했던 서갑숙 씨의 마음 안에 사랑이 가득했던 것처럼. 오직 사랑만이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내는 용기를 주며, 자신을 비난하고 이용했던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다. 서갑숙 씨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주인공’을 읽어보라고 권유하지 않겠다. 굳이 비교하자면 그녀의 삶보다 보다 훌륭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들이 많다. 스콧 니어링 부부나 레닌 부부, 퀴리 부부처럼. 이들 부부의 특징은 혁명적 실천을 위한 동반자였다는 것이다. 희망을 버린 적이 없으나 낮과 밤 동안, 여름과 겨울 동안 희망이 실현되게끔 움직였다. 그리고 이들의 실천에 무한한 영감과 신뢰를 불어 넣은 힘은 사랑이었다.

아무리 달리 표현한다고 해도 사랑은 에너지다. 자동차를 굴러가게 하는 게 기름이지만, 엔진이 없으면 기름이 소용없듯이 사랑은 그 안에 이미 이해심이라는 게 있다. 엔진 없는 자동차가 없는 것처럼, 사랑할 때 우리는 광속보다 빠른 속도로 그 혹은 그녀를 이해하고 있다. 이것은 사람이 죽는 것처럼 매우 불가사의한 일이다.

두 번이나 노벨상을 받은 것으로 유명한 라이너스 폴링 박사는 세포는 죽고 새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쉬지 않고 되풀이하기에 사람이 죽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실제로 미국에서 있어 세포 생존 실험에서 세포는 안정된 환경에서 결코 죽지 않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처럼 인간이란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단지 두뇌에 있다면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의 심정을 느낄 수 있고, 처음 만났는데 굉장히 오래 전부터 알았던 사람인양 친숙해지는 현상은 설명불가능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감정이 일어난다는 것을 느끼는 그 순간 그것은 그 전에 그러한 감정을 가졌던 비슷한 경험이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난로에 덴 경험이 있는 사람이 난로를 보면 난로를 경계하겠다는 무의식적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과 같이.

하여튼 사랑이란 석유같은 에너지다. 석유가 어떻게 발생했는가를 몰라도 석유를 쓸 수 있는 것처럼 사랑이란 에너지가 무엇인지 몰라도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 (석유를 화석 연료로 보는 건 잘못된 것이다. 그건 가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석유가 변성암의 발생 단계에서 만들어진다는 가설이 주목받고 있다.)

또 섹스는 사랑의 에너지를 최대 효율로 높이는 아주 좋은 엔진일 것이다. 이렇게 좋은 엔진이 우리 몸과 마음 안에 있다는 걸 올바로 이해할 때 우리는 강간이나 성추행 등 폭력적인 성 문화에서 불과 5분만에 벗어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나는 서갑숙 씨가 ‘주인공’을 쓴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녀는 더 이상 폭력적인 성 문화의 노예가 아니다.

참고로, 사랑이란 창조적인 에너지의 스펙트럼(사랑에 대한 개인의 마음)을 정말 열광적으로 느끼고, 이 뜨거운 용광로 속에서 ‘일치’라는 단어를 체험하고자 하고 싶은 사람은 또는 이 체험을 선택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노무현 정부의 이라크전 파병을 반대하는 집회에 참석해보기를 권유한다.

서로 다른 얼굴, 음색, 저마다 다른 환경을 가진 사람들이 한 가지 공통된 행동을 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는 점에서 스와핑과 비슷하지만, 전자는 ‘평화 쟁취’, ‘파병 반대’라는 사랑의 행동를 하기 위한 것이고, 후자는 쾌락이 목적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사랑의 목적은 행동이다.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에게 사랑은 영원히 대안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면 나만의 착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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