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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29(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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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경제위기와 공포의 마술, 에이즈
오늘날 경제위기와 공포의 마술, 에이즈
(모든 것은 의심될 수 있다. 일상적으로 자명한 것으로 되어 온 관념이 있다면. 학교, 교회, 폭력, 기술, 의료 등 사회 제도를 지탱하는 기관들과 이 기관에 의해 유포된 공포(심)는 신화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을 근원적 회의주의라고 한다. 나는 이 관점을 갖고 에이즈 공포의 근원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우리가 가장 쉽게 착각하고 있는 관념 중 하나는 ‘자율적 공생’이라는 것이다. 즉, 이 사회에서 한 개인은 자율적인 존재이며, 서로의 다양한 차이점을 인정하며 상호보완적으로 공생한다는 그것.
그러나 이 관념은 앞으로 실현되어야 할 미래의 전망쯤이나 될까. 지금 당장 발붙이고 살고 있는 현실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당신은 산업사회에 살고 있으며, 이 사회에서 최고의 덕목은 산업적, 생산적인 것이다. 정치경제학 개념으로는 자본주의라고 일컬으며, 자본주의를 현존하게 하는 동력은 끝없는 경쟁과 축적, 그것 뿐이다.
잘 알다시피, 지금 우리는 1929년 세계 대공황 이래 최대의 경제적 고비를 맞이하고 있다. 대우, sk 등 한때 천년제국을 약속하던 재벌들도 한순간에 송두리째 무너지고 있으며, 재벌만큼 독점 기반도 없던 중소규모 자본들은 몇 년 전부터 쑥대밭이 되었다.
그나마 기술력, 자본력, 시장성이 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며 일찌감치 공장 문 닫을 뻔했던 자본들도 이제는 넋을 놓았다. 남한 최대의 수출 주력 분야인 제조업은 2년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아우성을 친다.
(실제로 그렇게 될 것이다. 생산설비 시장은 남극보다 더 얼어붙었으며, 자본의 유통 및 투자는 가뭄을 만난 호수처럼 움직임이 없다. 결국 자본이 선택하는 것은 대규모 구조조정과 임금을 낮추는 것인데, 남한에서 실질임금이 지금보다 추락하면 심리적 사회안전망이 붕괴되기 때문에 정부 지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를 선호하는 노무현 정권에서 달라빚에 의존하는 정부 지원은 엄연한 한계에 봉착한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경제자유 지역을 만들어 노동자 최저 임금을 고작 50달러로 정하여 남한의 자본가를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일(노동자에게나 자본가에게나 재앙일 수밖에 없는 경제적 위기)이 발생했는가? 앞서 언급한 바대로 이 사회가 자본주의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축적율의 위기가 발생한 것이며, 인구의 70%가 거지로 전락한 아르헨티나는 남한이 가야할 길을 먼저 보여준 것에 불과하다.
자본가는 노동자를 희생시킴으로서 살아남고자 하며, 따라서 태풍 매미가 갱신했던 재해 신기록들은 신문 지상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사상 최대의 불황, 사상 최대의 실업율, 사상 최대의 자살율, 사상 최대의 범죄율 등등. 또 하나 더 덧붙인다면, 사상 최대 에이즈 공포증자 발생!
누구의 위기인가?
말로만 떠들던 자율적 공생 관계는 깨졌다. 이 거대한 경제적 재앙 앞에 우리는 수년, 수십년 간 가꾸어 온 희망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으며, 정부에서 주장해 온 천국의 꿈이 인간이 사는 어디에서나 절망과 슬픔으로 교차하는 것을 목도한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웃음을 참지 못하는 자들이 존재한다. ‘위기는 기회다.’, 이 말은 돈 있는 놈들의 신념이다. 독점 재벌은 경제적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몇 배 더 커진 부를 거머지기 마련. 그 이유는 사업 분야가 조선, 철강, 자동차, 반도체 등 안정된 수십 갈래로 흩어져 있어 위기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고, 기존에 잠식한 독점적 시장 경쟁력이 있기에 상품 가격을 인하하지 않아도 충분한 이윤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위기란 죽을 놈만 죽는 걸 의미한다.
경제적 위기에 대한 독점 자본의 이해관계를 웅변적으로 보여준 사례는 아이러니하게도 IMF 당시 짜장면 가격 인상이다. 전통적인 서민 음식으로서 군림해온 짜장면은 50, 60, 70년대에는 기존 경쟁 음식보다 싼 가격으로 전국적인 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다. 즉, 중국집의 8/2 전략인 짜장면은 실제적으로 이윤을 남기는 팔보채, 탕수육 등 요리 음식을 팔기 위해 미끼로 던진 잘 팔리는 싸구려 음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1990년대 이래 경기가 어려워지고 중국집이 난립하기 시작하자, 전국 각지의 중국집은 서로 경쟁적 협의체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그들만의 독점 음식인 짜장면 가격을 담합한 것이다. 이들의 담합 아래, 짜장면 가격은 일사불란하게 그리고 완강히 상승했다. 1000원에서 1,200원으로. 1,200원에서 1,500원으로. 1,500원에서 2,000원으로. 2,000원에서 2,500원으로. 이 엄청난 가격 인상은 불과 10년만에 이뤄졌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짜장면을 찾았으며, 중국집은 안정된 이윤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윽고, IMF가 터지고 유가 인상을 빌미로 각종 생활 용품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인상되자 중국집 업체들은 전격적인 짜장면 가격 인상을 공포했다. 2,500원에서 3,000원으로 인상한다는! IMF가 지나가고 유가는 다시 안정되었지만 중국집 업체들은 IMF 시기의 즐거움을 잊지 못했다. 짜장면 가격이 제자리로 돌아가기는 커녕 1년도 채 못 되어 3,500원이 되고 있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물론, 너무 치솟은 가격 때문에 영세 중국집은 부담을 느끼고, 앞 뒤 눈치를 살피며 3,000원대를 고수하고 있는 형편이지만. 이것이 바로 독점 카르텔이 뭔가를 보여주는 전향적인 사례인 것이다.
참고로, 짜장면 가격은 그저 먹기나 다름 없다. 추정하건대, 짜장면 100그릇을 만드는 데 드는 밀가루가 한 포대, 중국 짜장, 돼지고기, 감자, 양파 약간을 계산하면 모두 합쳐도 순수하게 드는 짜장면 가격은 300-500원 안에 불과하다. 여기에 인상된 주방장과 배달부의 임금 및 가게세를 감안해도 3,000원에 달하는 짜장면 가격은 터무니 없이 비싼 가격임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중국집에서 짜장면 판매는 카드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기에, 음식값에 포함된 20%의 세금을 포탈하여 순전히 자신의 몫으로 전도할 수 있으며, 따라서 IMF 이후 인상된 짜장면 가격은 실제적으로 200%가 넘는다. 게다가 짜장면은 요리를 먹기 전에 혹은 요리를 팔기 위해 제시된 오프닝 음식이란 걸 본다면, 중국집에서 담합을 통해 서민의 호주머니를 털어 이윤을 보충하는 독점 논리를 사용한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독점 담합도 독점 기업의 담합에 비하면 애교 수준에 불과하다.
무엇이 위기인가?
위기에는 여러 가지 차원이 있다. 자연재해와 같이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만 하는 위기가 아니면 인위적으로 조장된 위기 등등. 에이즈 공포증을 앓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노동자 계급 출신일 것이다. 거급 거듭 살펴본 바와 같이 현재 우리가 가진 정신적 공황 및 물질적 빈곤 그리고 경제적 위기는 사실 필연적인 위기와 인위적으로 조작된 위기가 절묘하게 섞여있는 것이다.
돌아보건대, 1973년과 1979년 남한은 석유파동을 감당하지 못해 많은 실업자를 양산해야 했다. 제자리 걸음인 임금은 치솟아 오른 물가로 인해 피부로 느낀 실질 임금은 크게 하락했으며, 성장률의 하락으로 인해 여기 저기서 거지들을 쉽게 볼 수 있었던 상황을 맞이했다. 여기서 우리는 석유파동을 마치 자연재해인양 설명하고 있는 멍청이들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석유파동은 석유 메이져 자본에 의해 인위적으로 조장된 경제 불황이었기 때문이다.
알려져 있기로 석유파동은 국제 석유자본이 원유 공시가격을 인하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산유국들이 오펙이라는 기구를 결성하여 공시 가격의 회복, 인상을 주도한 과정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산유국들의 석유 생산 시설 및 정유 시설 중 90% 이상이 미국에 본부를 두고 있는 석유 메이져 자본의 소유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짜고 치는 고스톱을 한 셈인데 이 고스톱의 목적은 천문학적인 이윤을 거둬들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석유파동 이후에도 석유 매장량으로 본다면, 세계 10위 안에 포함되는 미국이 자국 내 석유 생산 및 정유를 정지했던 것이다. 이때 석유 기업인 엑손이 세계 최대의 메이져 자본으로 급부상할 수 있었다.
이렇듯, 인위적으로 조장된 위기는 아주 다양하다. 1970년대 가장 큰 국제적 쟁점이었던 식량 독점 위기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당시 미국은 소련이 밀을 다량 구매하여 제3세계 민중이 굶주리고 있다고 비난했으나, 사실 소련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미국이 캘리포니아의 밀 재배 농민에게 밀 생산을 중지, 휴농하도록 권유하였으며 그 대가로 정부 지원금을 제시했다. 세계적 곡창 지대인 캘리포니아 등 미국 내 밀 생산이 중지되자 세계적으로 밀의 공급은 축소되었고, 식량 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어 올랐다. 이를 통해 일본과 미국에 본부를 둔 식량 메이져 기업들은 엄청난 이윤을 손에 쥘 수 있었으며, 미국 정부는 정치적으로 소련을 공격하는 구실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위기는 독점 자본을 살찌우기 위해 일어나며, 제국주의 시대의 경제학은 간단명료하다.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
누가 누굴 죽이고 있는가?
우생학적 다윈주의자들이 지껄이는 것처럼 자본주의의 생존 법칙은 마치 피라미드식 먹이사슬과 빼닮았다. 상위 1-2%의 독점 자본이 98%의 자본 및 노동력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밀림의 법칙처럼. 그래서 단 1,000명도 안 되는 소수 자본가가 전세계 부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를 테면, 오늘날 같은 공황 시기에 독점 자본이 이윤을 수탈하는 방식은 1930년대 이전 식민주의 시대와는 달리 간접적이지만, 보다 흉폭하다. 보기를 들자면, SK의 대주주는 외국의 공격형 펀드 회사이다. 단 몇 달 사이에 몇 천억 이상을 수탈해가는 이들의 공격 대상은 SK 그 자체가 아니라, SK에서 착취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노동력이다. 즉, SK가 노동자를 착취하여 큰 이윤을 남기지 않았다면 이들 펀드 회사들도 SK를 집적거릴 이유가 없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전혀 알지도 못하는 자본가들을 위해 하루종일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수탈이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는 데 있다. 경제적 상황이 그나마 안정적이라면, 미래를 꿈꾸며 저축하고 계획을 세워볼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이 뒤죽박죽 흔들리고 삶의 안전성이 전혀 보장받지 못하는 불안한 현재 상황에서 당신이 숨쉴 수 있는 공간은 음란한 환상이나 그 환상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화려한 뒷골목이 될 수 있다.
기존에 가져 온 도덕성과 윤리적 생활방식 등 점잖은 가치관은 칡 덩굴이 얼키는 것 마냥 갈등을 빚게 되고, 당연히 죄값을 받아야 한다는 알 수 없는 죄책감마저 고개를 든다. 우리가 비단 SK에서 착취받고, 수탈받는 노동자가 아니라 하물며 실업자라고 해도 자신을 비하하는 상황은 마찬가지다.
또한 정부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 노동자와 실업자가 현재 자신이 겪고 있는 상황의 본질을 인식하게 될 경우, 스스로 조직하고 단결하여 삶의 질 향상을 위한 행동을 할 것임을 잘 알고 있기에, 불행한 모든 문제를 개인에게 환원하여 자기 비하와 절망에 빠져 들어 위축된 모습을 조장하는 것이다.
20대와 60대의 자살율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지금도 정부가 그 어떤 특단의 대책을 세우지 않는 것을 보라. 하지만 파업을 하는 노동자는 구타, 살해, 해고, 모욕을 포함해서 심지어 도로교통법이나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면서 노동자가 한해 내야 할 세금은 300만원대를 훌쩍 뛰어넘었다. 대안도 없고, 정책도 없는! 하지만 전기세를 내지 않으면 전기를 끓는 등 세금을 내지 않으면 지옥까지 쫓아오는 공무원들. 이러한 정부가 부자들에게는 세금 감면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공포의 뿌리
에이즈 공포증은 이러한 큰 맥락을 형성하는 작은 뿌리다. 공포는 바로 이 자본주의 세상이며, 태어나자마자 우리가 배우는 것은 공포심이다. 이 세상에 만연해있는 허무주의, 냉소주의, 개인주의, 이기주의는 단지 이름만 달리 부를 뿐 어원은 단 하나다. 공포!
정신분석학자들은 잘 알고 있지만, 기억이란 감정 속에 들어 있다. 프로이트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카타르시스 요법이란 결국에는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감정 속에 용해되어 있는 기억을 웃음과 울음을 통해 풀어내는 것이다. 이를 연극으로 연출하면, 사이코 드라마라고 한다.
손끝, 발끝마다 감정의 기억이 가득한 우리에게 공포의 기억을 주입한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건강하고 행복한 존재로만 -적어도 자기소개서에는- 이야기하고 싶은 가정은 공포의 존재였으며, 온갖 끔찍한 범죄가 자행되는 가족 이데올로기의 소굴이다.
소굴이란 단어가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그런대로 좀 참을 만한 가정에서 살았던 사람이다. 이 땅의 30만 결식 아동 그리고 폭력과 학대, 무관심에 시달리는 100만명 이상의 아동들은 일찌감치 아픔과 배고픔과 어둠 속에서 공포를 충분히 맛보았기 때문이다. 이 아이들에게 가정은 더 이상 울타리가 아니라, 사방이 꽉 막힌 감옥에 불과하다.
한 번 공포를 질리기 시작하면 그 공포에서 헤어나온다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만일, 당신이 뜨거운 난로에 손을 댄 적이 있다면 ‘뜨겁다’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게 된다. 손을 댄 정도가 크면 클수록. 이처럼 공포는 특별한 경험에서 일반적인 경험으로 확대된다.
혹은 당신이 성교육을 전혀 받아본 적이 없던 상황에서 폭력적인 성 행위가 난무한 포르노를 즐겼다면 성에 대한 의식 및 행동은 파탄을 맞이하기 십상이다. 단지,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 뿐. 게다가 당신이 남자라면 그러한 성의식은 여성으로 하여금 2차적 공포감을 불러 일으킬 요인이 된다.
이러한 성적 공포감이 만연한 국가가 일본이다. 특유의 억압적 가부장제와 숨막히는 경제적 질곡, 갑작스런 핵가족화로 인해 발생한 세대간 단절과 난폭한 성 문화를 배운 남성의 증가는 여성이 남성을 피하거나 대안을 찾지 못해 침묵하게 만드는 작금의 현실을 빚어냈고, 남성은 남성대로 인간 본래의 성적 능력을 잃어버인 채 섹스 문화의 종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를 타개할 정책을 수립하지 않았다. 섹스는 민중을 체제내화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었으며, 불만 불평을 막는 훌륭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표면적으로 우리가 아는 일본은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이지만, 실제로는 한해 벌어들인 총 자본의 50%는 다시 외국으로 재투자가 되고, 나머지 50%만이 국내에 환원되고 있다.
이러한 제국주의 경제 정책은 일본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을 최악으로 떨어 뜨리고 말았다. 형식적으로는 세계 제1의 임금을 받고 있지만, 앙등된 물가로 인해 실질임금 및 삶의 질은 한국 노동자의 수준에도 못 미치는 것이다. 일본 민중이 섹스에 집착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공포!
이렇듯,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성관계, 이것은 서로를 피곤하고 허무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공포는 전달되고 유행을 타기 시작한다.
이어서 공포를 이야기할 때 가장 쉽게 들먹거릴 수 있는 역사적인 사례가 있다. 1919년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를 필두로 역사에 모습을 드러낸 파시즘이 그것이다. 독일에서는 나치즘, 일본에서는 군국주의, 스페인에서는 프랑코주의를 표방한 파시즘은 반합리주의, 국수주의, 인종주의, 엘리트주의를 내세우는 미치광이 이념이다.
그런데 역사책에서는 절대로 안 가르쳐주는 진실은 따로 있다. 당시 세계적 대자본가들은 모두 파시즘을 전폭적으로 지지했으며, 심지어 자유주의자들도 파시즘을 지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찰리 채플린이 파시즘을 조롱하는 영화 [독재자]를 제작했을 때 이 영화는 헐리우드에서 추방될 뻔 했다.
또 재미있는 사실은 1930년 9월 총선거에서 나치스가 18.3%의 득표율로 사민당에 이어 제2당이 될 때까지 독일의 민중은 나치즘을 과소평가했다는 것이다. 당시 독일의 교육 수준은 세계 최고였으며, 인구의 대부분이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치적 권력은 히틀러에게 돌아갔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가중되는 인플레이션과 경제가 악화되어 생활 수준이 비참해지는 것에 대한 독일 민중의 공포와 사민당의 혁명성을 경계한 자본가들의 공포가 그것. 문제는 당시 독일에서 발생한 무려 1,000%에 달하는 살인적 인플레이션이 대자본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조장된 것이었다는 데 있다. 휴지조각으로 변한 채권 등 재화를 사들인 자본가들은 1차대전의 후유증을 만회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년 후 2차 세계대전이 발생한다.
(2차 세계대전에서 전세계의 대자본가들은 파시즘을 지지했다. 독일이 무서운 속도로 1차 대전의 후유증을 회복한 뒤 신속하게 유럽을 석권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바다를 덮을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자본이 전달되고, 첨단 기술이 전수되었다. 포드는 탱크 만드는 기술을, 제약회사는 화학무기 만드는 기술을, 월가는 석유를, 현재 미국 대통령인 조지 부시의 할아버지는 미국에서 독일로 보내지는 후원 자금을 관리했다.)
그러나 예상을 뒤엎고 독일이 소련에서 패배하자, 소련의 역공이 시작되었고 독일 함락이 눈 앞에 닥쳤다. 그러자 그 동안 관망만 하던 미국이 서둘러 개입한 것이다. 소련의 진격을 막기 위해.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급조된 것이며,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과 소련은 유럽을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는 협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미국은 자본주의 역사 100년만에 세계 최강의 경제력을 갖게 되었다.)
에이즈 공포의 촉수
에이즈 이데올로기에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무형의 이익이 있다. 모든 바이러스 이데올로기가 그러했듯이 그것은 경제적, 정치적 위기 및 그 원인을 왜곡시킨다. 게다가 의학은 멀쩡한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평균 수명율에 대한 논리도 그러하다. 의학의 발달로 인해 수명이 늘어났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 사용하는 평균 수명율은 순전히 새빨간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다. 유아 사망의 놀랄 만한 저하는 영양의 개선과 생활 수준의 향상을 의미하는 사회보장제도가 확립된 후 나타난 현상일 뿐, 제3세계의 유아 사망률은 여전히 높기만 하다. 왜냐하면, 그 나라엔 사회보장제도가 없으니까. 하지만 에이즈 과학자들은 이게 에이즈 사망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묻는다. ‘당신들은 지금 이 순간도 세계 인구의 1/3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일주일 생계비 1달러에 불과하고, 매일 밤 굶주림을 참고 잠을 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석기 시대에도 사람들이 이렇게 굶주렸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기아와 추위에 허덕이는 사람들의 건강에 대해 에이즈라는 제국주의적 진단명을 붙이는 당신에게 도대체 뇌와 심장이 있기나 할까?’
바로 이것이다. 기아의 원인은 아프리카 사람들이 게으르기 때문이 아니라 -하지만 신자유주의자들은 게으름이 문제라고 우긴다.- 식량을 살 수 있는 구매력, 즉 화폐가 없기 때문이다. 경제학에서 ‘유효 수요’라고 부르는 이것은 식량에 대한 수요와 식량을 구매할 수 있는 실제 수요를 가리킨다.
아프리카 사람에게 화폐가 없는 건 당연하다. 생산설비와 이를 구축할 투자가 없기 때문이다. 실업이 만연하게 되고, 실업자에게는 굶어죽을 자유가 주어진다. 이 순간에도 미국은 식량을 태평양에 쏟아 버리고 있는데. (진짜 버리고 있다. 남아도는 식량을 버리는 이유는 수요와 공급을 맞추기 위해서다. 자본가들은 절대로 아프리카에 식량을 주지 않는다. 반드시 팔아서 이윤을 남기는 게 목적이기에.)
그래도 에이즈 시대에 사는 게 다행이다. 만일, 당신이 1960년대에 살았다면, 혹은 미국에 살았다면 과도하게 공포증에 시달리는 증상(?)과 에로틱한 환상을 갖는 증상(?)에 대한 처방으로서 뇌엽절제술이라는 끔찍한 뇌수술을 받았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뇌수술을 받은 사람은 죽거나 바보가 되었다.
원래 이런 거다. 자본주의에서 정상적인 생각을 갖기를 원치 말라. 상식적인 존재란 정상적인 존재가 아닌 상태, 즉 통제 가능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이러한 상식의 기반 위에서 제약회사는 20세기에 무려 100배나 성장했으며, 21세기에도 고속 성장을 위해 에이즈 이데올로기를 사용한다.
HIV 검사를 받으러 갈 때 마다 당신은 파스퇴르 연구소와 로버트 갤로에게 로열티를 내며, 제약회사의 호주머니를 두둑하게 챙겨준다. 만일, 양성 반응을 보이면 당신에게는 에이즈 상담가 혹은 박애주의를 앞세운 영업사원들이 찾아올 것이다. ‘AZT를 복용하세요. 세 가지를 함께 복용하면 더욱 좋습니다. 약값은 한 달에 백만원 정도밖에 안 합니다. (약값 걱정은 하지 마세요. 이 약을 복용하면 회복할 수 없는 독성 때문에 아무리 질긴 목숨이라도 3년을 못 넘길 테니까.)’
제약회사의 영업전략은 성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히스패닉, 흑인, 동양인을 대상으로 한 영업전략말이다. 백인은 더 이상 건들 수도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서방 제국의 사회적 안전망은 백인의 생존권이기에, 그가 마약중독자라고 할 지라도 그저 마약 치료만할 뿐이다. 그러나 마약을 한 사람이 흑인이거나 동양인이라면 꼼짝없이 ‘에이즈’라는 딱지를 붙인다. HIV 양성인의 90% 이상이 마약중독자인 인도네시아처럼.
이중에서 특히, 구매력이 있는 남한은 제약회사에서 가장 눈여겨보는 잠재력 있는 시장이기도 하다. 앞서 ‘유효 수요’라는 단어를 썼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유효 수요가 구매력(화폐)을 가진 시장임을 뜻한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현재 남한의 항HIV 치료제 구매력은 정부의 호주머니(세금)에서 지출되고 있다. 만일, 당신이 제약회사의 CEO라면 금방 실감을 할 수 있다. 얼마나 큰 돈을 벌 수 있을지!
이런 상황에다가 더 이로운 점은 남한의 의료체계가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로 똘똘 뭉쳐있고, 에이즈 예방을 홍보한다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제약회사에게 -무조건- 호의적이기에 남한은 보물창고나 다름없다. 그런 이유로 제약회사들은 항HIV 치료제 생산 공장을 한국에 짓기 위해 막대한 자본을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웃 나라 일본이나 태평양 건너의 미국에서도 에이즈 공포가 사라졌고, 유럽(특히, 북유럽)에서는 에이즈 공포란 단어 자체가 무의미한 상태에서 유독 남한에서만 에이즈 공포가 기승을 떨치는 이유를 달리 고민할 필요가 없다. 분명한 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에이즈 공포(를 유포하고 조장하는)의 촉수가 남한에서 활개를 치고 있기 때문이다.
공포의 근원에 대한 합리화
자신만이 현대의학이라고 헛소리를 하는 소위 현대의학(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특정병인론적 기계의학)은 스스로를 고도의 치료 유효성을 가진 치료체계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현대의학만이 생물학적 의학의 대명사이며, 유일한 사회적 기준이라고 떠들고 있다. 맞긴는 맞다. 브라질에는 그 흔한 보건소조차 찾아보기 어렵지만, 브라질 경찰은 값비싼 생명연장 장치를 사용해서 죄수를 고문하고 있다. 상상해보라. 심장에다가 전기충격을 준다는 걸!
현대의학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 중에는 언제나 고문이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19세기 때 영국의 국왕은 의사에게 죄수가 고문에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시험하는 의견서를 내도록 했다. 그것이 지금은 환자가 수술이나 약을 먹고 얼마나 오랫동안 견딜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시대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를 테면, 고혈압 환자에 대한 약물요법은 악성 상태에 있는 소수에게 유효하나 부작용의 위험이 크다. 또한 고혈압에 환자에 대한 지속적인 약물요법은 고혈압을 지속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오히려 식이요법이 약물요법보다 더 뛰어난 효과를 갖고 있음 역시 밝혀졌다. 문제는 이와 같은 태도가 병원에서는 일상적으로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AZT로 대표되는 항HIV 치료제는 약물인양 둔갑된 독극물의 극단적인 형태를 갖는다. 약을 먹지만 않았어도 지금도 건강하게 살고 있을 HIV 양성인들이 바보가 되거나 반신불수, 암에 걸려 마침내 목숨을 잃고 있다. 이를 전문적 용어로 ‘병원병’이라고 한다. 병원병이란 치료, 의사 또는 병원이 오히려 병을 발생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는 모든 임상적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나 AZT를 복용하라고 강요하거나 지속적으로 권유하는 의사나 에이즈 단체의 영업사원들은 이 모든 비윤리적 행위를 자기합리화하고 있다. [병원이 병을 만든다]의 저자인 이반 일리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사와 병원의) 태만은 <우연한 인간적 오류> 또는 <시스템의 실패>로 미화되고, 무감각은 <과학적인 냉정함>으로 호도되며, 무능은 <전문적 장치의 부족>으로 합리화되고 있다. 진단과 치료의 비인간화는 의료 과오를 윤리적 문제에서 단순한 기술적 문제로 변모시켜 왔다.”
위대한 사상가인 이반 일리치는 올해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에이즈의 공포만은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에이즈에 관한 한 의사와 영업사원들은 ‘태만은 <에이즈의 발병>으로 미화하고, 에이즈에 대한 무식함은 <과학적인 냉정함>으로 호도하며, HIV 양성인의 약물 사망은 <에이즈 사망>으로 합리화하고’ 있다.
그리고 에이즈에 있어 기술적인 문제란 아예 없다. 모든 논문, 사례, 경험, 주장이 조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HIV가 입증되지 않아도 HIV는 존재하며, HIV 양성인의 70%가 약물중독으로 인한 세포 변이인 간암으로 사망했음에도 원인 규명은 하지 않고, AZT가 임상실험에서 약물 임상실험 역사상 최대의 사망자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최고의 약물 혹은 아스피린와 같은 마법의 탄환으로 미화되고 있다.
이들 제약회사를 위시한 의사와 갖가지 감투를 뒤집어 쓴 영업사원의 쌩까(쌩까라는 은어는 ‘무시한다’는 뜻이다.)는 정신에 경의를 표할 뿐이다. 또한 이들의 불법행위를 눈감아주거나 그 자신이 그 행위의 중심에 서서 존재하는 정치인과 아예 문제의식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법기관에게 고대 로마법을 들척이며 공부 좀 하기를 요구한다.
로마법에서는 의료에 의해 가해진 불법행위를 처벌하는 조항이 있으며, 이때 의사가 무지하든가, 무모하든가 만이 아니라 의사가 환자에게 건방지다고 해도 법적으로 처벌을 하였다. 또한 시민들은 의사의 과오를 보복으로 끝내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를 보더라도, 현재 항HIV 치료제 복용을 강요하고, HIV 양성인을 뱀 보듯 혐오하는 의사가 만일 로마에 살았다면 그의 운명은 안 봐도 뻔하다.
공포는 오류다
에이즈 이데올로기는 탐욕에서 빚어진 인위적인 공포 이념이다. 제약회사의 탐욕은 AZT로, 정치권력의 탐욕은 체제안정으로, 문화적 제국주의인 기독교와 카톨릭의 탐욕에게는 하느님의 단죄로, 에이즈 과학자와 얼빵한 영업사원들에게는 명예와 일자리의 수단으로 정착된 위험한 망상이다.
분명한 사실은 당신이 에이즈 공포증자이든, HIV 양성인이든 간에 병원의 의사를 만나는 것과 북한산에서 무당을 만나는 것은 결론적으로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중세에 활발했던 마녀사냥 당시 의사들은 재판에 끌려 온 마녀를 심문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알리바이를 대지 못하면 신속하게 마녀라는 진단을 내렸다. 에이즈 시대에 당신이 의사를 만나 댈 수 있는 알리바이는 ‘난 단 한 번도 섹스를 한 적이 없고, 수혈한 적도 없으며, 다른 사람의 칫솔이나 면도기를 사용한 경험도 없다.’는 것 뿐이고, 또한 반드시(?) 입증해야만 한다.
그러나 위험한 망상을 깨기란 하늘의 별을 따기보다 어렵다. 당신을 앞에 둔 의사는 권선징악을 실현하는 재판관이자 마법사이기 때문이다. 일단, 마피아로부터 양의 목을 선물받았다면 죽음을 피하기 어려운 것처럼. 누가 HIV 검사를 하라고 하거나 항HIV 치료제를 복용하라고 권유할 때 이를 거절하지 못한다면 죽음의 행렬은 예견가능한 미래의 모습에 불과하다.
어차피, 한 번 HIV 검사를 받으면 여간해서 에이즈 공포증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또한 한 번 HIV 양성 판정을 받으면 죽을 때까지 HIV 양성인으로 살아야 할 테니까. 이후 HIV 음성이 100번 반응되었다고 할 지라도 의사들은 HIV가 혈액 속에 몰래 숨어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다시 음성으로 판정받는 방법은 단 하나 뿐이다. 의료과실이었음을 입증하는 그것! 하지만 그 대신 HIV 테스트가 어쩌다 있는 예외 상황만 제외하면 완전무결하다는 사상 전향서에 도장을 찍어야 한다.)
결론을 대신하며
에이즈 공포증은 욕망의 산업화와 확대된 정치권력이 만들어낸 이념적 괴물이다. 문제는 이 괴물이 풍토병처럼 질기고 구조적인 차원인데 있다. 그러니, 이제 당신이 걷는 이 지옥의 땅에서 누가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말고 뒤도 돌아보면 안 될 것이다. 오직 앞만, 주의 깊게 살펴보라. 가장 완벽한 증거가 거기에 있다. 에이즈는 없다!
우리는 좋지 않은 시대에 태어났을 뿐이다. 브레히트의 싯귀처럼 서정시를 쓸 수 없는 시대이며, 오직 구부러진 저 등나무만이 우리의 모습, 시대적 진실을 상징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어찌하랴. 만약, 당신이 복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우리와 함께 일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에이즈계에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존재가 있다면, 에이즈에 대한 그들의 부조리함을 폭로하는 문건을 땅 아래 인간에게 전달할 지도 모른다.
거짓말쟁이 독수리에게 심장을 쪼아 먹히는 고통쯤이야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 오직 심장만이 진짜이기에. 에이즈 공포의 근원을 인식했을 때 우리의 심장도 모두 진짜가 될 것이다. 공포는 논리적 오류라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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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를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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