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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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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로 둔갑된 말라리아 이야기
아프리카에서 매년 사망율 1위를 기록하고 있는 말라리아에 대한 설명입니다. 에이즈 과학자들은 말라리아 환자를 에이즈 환자로 둔갑시켜 이들의 사망을 에이즈 사망이라고 조작하고 있는데, 이 글을 통해 여러분은 말라리아가 무엇이며, 치료제 및 말라리아 자체를 예방하기 위한 예방활동이 무엇인지를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에이즈 뿐만 아니라 말라리아 사망도 오직 탐욕에만 눈이 먼 정치권력과 제약회사의 이윤 논리에 의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00년 6월에 발행된 우표세계 19호에 실린 글입니다.
우표로 본 의학이야기(1)
말라리아
말라리아의 역사
말라리아가 문헌에 처음 나타난 것은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기원전 460?~377?)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42명의 열성 환자를 관찰하여 말라리아에 걸린 환자는 열이 오르면서 한기를 느낀다는 증세를 기술하였다. 그러나 히포크라테스가 말라리아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던 것은 아니며, 그의 저술만으로 당시 그리스에 현재의 말라리아라고 하는 질병을 가진 환자를 있었다고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왜냐 하면 그의 기술이 현재의 말라리아인지, 아니면 다른 열성 질환인지 구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약 300년이 지난 후 로마의 학자 바로(Marcus Terentius Varro, BC 116~27)는 “보이지 않지만 늪지대에 살고 있는 어떤 미세한 물질이 입과 코를 통해 인체에 들어오면 질병을 일으킨다”며 집을 지을 때는 늪지대를 피해야 한다고 소개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고대 마케도니아의 정복 군주 알렉산더 대왕(Alexandros, BC 356~323)도 말라리아 감염 때문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지금까지 지구상의 모든 전쟁과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보다 말라리아 한 질병에 의한 사망자가 더 많을 것이라는 통계자료도 있을 정도로 말라리아는 역사를 통해 인류를 가장 많이 괴롭힌 질병의 하나이다. 5세기 경 로마에서는 한 차례 말라리아가 유행하기도 했으며, 이 때부터 유럽에서도 말라리아와 관련된 기록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말라리아란 영어로 나쁘다는 뜻의 “mal”과 공기를 뜻하는 “air”가 합쳐진 말로 “나쁜 공기”를 이탈리아어로 발음하면 말라리아가 된다. 이와 같은 이름의 유래를 가지게 된 것은 공기중에 어떤 미지의 물질이 포함되어 공기가 나빠지는 것이 질병의 원인이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말라리아에는 특별한 치료법이 없었으나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어 탐험의 시대가 열리면서 많은 탐험가들과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천지로 떠나는 개척자들, 그리고 선교사들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면서 말라리아의 치료법이 소개되기 시작되었다. 때는 16세기 초기, 남아메리카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가톨릭 예수회 신부들은 말라리아 치료를 위해 원주민들이 “키나”라고 부르는 나무 껍질을 달여 먹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이와 같은 방법이 환자 치료에 효과가 있음을 발견하였고, 1630년경 유럽에서 말라리아가 대유행을 일으켰을 때 이 나무의 껍질을 유럽으로 보내기도 했다. 이것이 말라리아 치료를 위해 나무껍질을 사용한 문헌상 최초의 기록이며, 그 전에는 남아메리카에서 치료법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유럽 의학계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왕립의과대학의 교수들이나 의사들
은 이 재료들을 “예수회 선교사의 가루”라는 이름으로 철저히 무시하였으므로 치료제로 사용되지 못하던중 1670년대에 영국에서 다시 말라리아가 유행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때 특효약을 가지고 나타난 사람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탈보였다. 탈보는 자신이 말라리아 특효약을 발견했다고 선전을 하며 가루로 된 약을 판매하였고, 그에게서 이 약을 구입해 사용한 환자들이 완치되곤 하였으며 탈보는 1672년 자신이 사용한 약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때마침 찰스 2세(Charles II, 1630~1685)는 자신에게 말라리아 증상이 나타나자 탈보가 만든 약을 복용하고 증세가 호전되었고, 프랑스 루이 14세(Louis XIV, 1638~1715)의 황태자가 말라리아로 고생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는 탈보를 프랑스로 보내 황태자의 생명을 구해 내기도 했다.
탈보는 1681년에 사망하였으며, 그가 죽은 후에야 탈보가 말라리아 치료제로 사용했던 가루가 남아메리카에서 전해진 키나의 가루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비슷한 시기에 시네덤도 이 가루의 효과를 기록한 바 있으나 의학계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일반인들 사이에서만 전해지고, 때로는 남용되기도 하는 문제를 가져왔다.
말라리아 치료제 키니네
정확한 작용기전이 밝혀지지 않은 채 오랜 기간 말라리아 치료로 이용되던 키나 가루의 효과를 입증한 사람은 뻴르띠에(Pierre Joseph Pelletier, 1788~1842)와 까방뚜(Joseph Caventou, 1795~1877)에 의해서였다.
약학을 전공한 뻴르띠에는 졸업 후 약사이던 아버지의 개인 연구실에서 여러 가지 복합물질로부터 여러 가지 성분들을 분리하는 연구를 하였으며, 까방뚜와 함께 일하게 된 1817년까지 신물질의 분리 및 분석에 관한 연구를 전개하였다. 뻴르띠에와 까방뚜는 주로 식물성 물질 분리에 관한 공동연구를 진행하여 인체에 경련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스트리키닌을 분리하는 등 여러 업적을 남겼으며, 1820년 드디어 “키나”에서 “키니네(quinine)”라는 물질을 분리하여 이 물질이 바로 말라리아에 효과를 나타내는 물질임을 알게 되었다. 그 때까지 말라리아에 효과를 지닌다는 사실이 알려 있었으면서도 그 성분과 작용기전에 규명되지 않았던 까닭에 의학계에서는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뻴르띠에와 까방뚜의 키니네 발견은 새로운 치료제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게 되었고, 한 때 그 부작용을 염려한 의사들에 의해 널리 이용되지 않기도 했으나 차차 그 효과의 탁월함이 증명되어 19세기가 끝나는 날까지 유일한 말라리아 치료제로서 그 역할을 다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들의 모국 프랑스는 1970년 키니네 발견 150주년 기념우표를 발행하여 그들의 업적을 재조명해 주었다.
초기 연구의 발전과 두 차례의 노벨상
말라리아에 대한 치료제가 개발되었다고 해서 말라리아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환자 발생은 계속해서 줄을 잇고 있었고, 질병의 원인 및 병인을 밝혀내기 위한 연구는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단지 결과가 없었을 뿐이었다.
19세기 말 빠스뙤르(Louis Pasteur, 1812~1895)에 의해 미생물학이 발전되면서 인간의 질병중 많은 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생명체, 즉 미생물에 의해 발생한다는 생각이 주류를 이루게 되자 말라리아의 원인균을 찾으려는 연구가 행해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알제리에 근무하던 프랑스 외과의사 라브랑(Charles Louis Alphonse Laveran, 1845~1922)은 말라리아 환자들로부터 채취한 혈액을 관찰하던 중 혈액 속의 적혈구 안에 그 때가지 알려지지 않았던 작은 유기체가 존재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유기체는 세균과 질병의 관련성을 규정한 코흐(Robert Koch, 1843~1910, 1905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의 4원칙에 맞지 않는 등 세균과는 다른 물질로 판명되었으며, 원생동물임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말라리아는 최초로 발견된 병원성 원생동물로 기록되었다.
한편 모험을 즐기던 영국의 로스(Ronald Ross, 1857~1932)는 1881년부터 7년간 인도에서 의료봉사 활동을 하였다. 1883년 인도에 있던 영국의사 킹(Albert King, 1841~1914)은 19가지 이유를 제시하면서 말라리아가 모기로 인해 전파되는 질병이라는 자신의 견해를 발표하였고, “열대병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스코틀랜드 출신 영국의사 맨슨(Sir Patrick Manson, 1844~1922)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했다.
한편 미국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 4학년 학생이던 맥컬럼(William MacCallum)과 오피(Eugene Lindsay Opie)는 1887년 새의 적혈구에 기생하는 원충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여 인체 외에서 기생하는 말라리아 원충을 처음 발견하였으며 생시과정에 생겨나는 사상체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로스는 말라리아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려 했으나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없어서 고민하던 중 1894년 휴가를 얻어 런던에 갈 기회를 얻게 되자 곧바로 맨슨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맨슨은 모기가 말라리아 환자의 피를 흡입한 후 다시 건강한 환자를 찌르게 되면 건강한 사람을 발병시킬 수 있으며, 이 때 사람의 피를 흡입한 모기의 체내에서 일정한 생활환(life cycle)을 경유하는 동안 환자의 혈액을 통해 들어온 유충이 성충으로 자라서 건강한 사람에게서 감염력을 지닐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의 가설을 설명해 주었고, 이를 믿은 로스는 말라리아 환자의 혈액을 흡입한 모기를 1,000마리 이상 해부하면서 연구를 계속했다. 1897년 로스는 말라리아 환자의 혈액을 섭취한 모기를 해부하여 모기 위벽에 주머니모양의 작은 돌기가 생긴 것을 발견하고 이 세포의 핵으로부터 가늘고 긴 충체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로스가 인도를 떠난 후 1899년 이탈리아의 그라시(Giovanni Battista Grassi, 1854~1925)를 비롯한 여러 연구팀은 건강한 자원자를 대상으로 말라리아 환자의 혈액을 흡입한 모기가 찌르게 하는 방법으로 실험한 결과 여러 종류의 모기중 아노펠레스(Anopheles) 모기만이 말라리아 전파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발표하였다.
1900년대에 들어서자 독일에서도 말라리아 연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 등장하였다. 후에 매독균 발견자로 의학역사에 이름을 떨치게 되는 미생물학자 샤우딘(Fritz Richard Shaudinn, 1871~190?)은 독일정부에 의해 해양 원생동물학을 연구하던 중인 1901년 모기에 존재하는 말라리아 원충이 유성환(sexual cycle) 말기에 포자(sporozoite)가 적혈구에 들어가서 기생하며, 인체에서는 무성환(asexual cycle) 말기에 merozoite가 적혈구에 기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로써 모기내에서 말라리아 원충의 발육과정이 어느 정도 알려지게 되었고 말라리아의 생활사가 거의 완성될 수 있었다.
로스는 “말라리아의 감염경로를 규명”한 연구공로를 인정받아 190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으며, 이후 유럽을 비롯한 여러 나라와 많은 학회에서 많은 영예를 받았고, 런던에 자신을 기념하여 이름붙인 로스 열대병 연구소와 그 부속병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제 1차 세계대전 중에는 인도군의 고문의사로 참전하기도 했으며, 전쟁 후에는 평생 말라리아에 대한 관심을 지우지 않고 적도 지방에 위치한 수많은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말라리아 해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젊은 시절 공부했던 수학을 응용하여 전염병학 연구에 수학적 방법을 도입한 첫 번째 학자로 그의 보고서인 “Mauritius 보고서(1908)”, “말라리아 예방법(1911)”, “과학보고(1915) 등에는 수학에 대한 그의 조예깊은 실력이 발휘되기도 했다. 인도에서는 그의 포자(sporozoite) 발견 100주년이 되는 해에 로스를 도안으로 한 우표를 발행하였다.
또한인체에서 병을 일으키는 원생동물을 최초로 발견한 라브랑은 “말라리아의 원충을 발견”한 공로로 1907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다. 라브랑은 말라리아 외에도 아프리카의 수면병인 라슈마이어증, 아메바성 이질, 샤가스씨병 등 열대성 질환을 일으키는 원생동물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여 수많은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말라리아란 어떤 질병인가?
기온이 16~34oC이고 습도가 60%이상인 경우에 모기가 부화되기 용이하고 모기체내의 말라리아 원충 발육이 잘 이루어지므로 더운 기후에서 말라리아가 호발하며, 양호한 건강상태와 깨끗한 주거환경, 모기부화장소의 감소 등에 의해 말라리아를 예방할 수 있다. 말라리아에 감염된 모기가 사람의 혈액을 흡입하는 경우 모기의 침을 통해 인체내로 유충이 들어와 성숙하면서 인체감염이 이루어지며 모기에 물린 후 1주일 정도 잠복기를 지나면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잠복기동안 간세포내에서 포자가 분열하면 간세포에서 빠져나온 merozoite는 적혈구에 침입하여 성장한 후 적혈구를 파괴시키면서 빠져나오게 되는데 이 때 원충의 대사산물이 혈액에 유리되면서 증상이 나타나게 된다. 초기에는 원인 불명의 열이 발생하고, 질병이 진행되면 빈혈, 피로, 황달, 오한, 땀 등의 발작이 나타나며, 더 진행하면 경련, 의식장애, 비장종대 등이 발생하게 된다. 원충이 적혈구를 파괴하거나, 면역체로 부착된 적혈구가 비장에서 제거되는 경우, 그리고 자가면역에 의한 적혈구의 용해, 철분과 heme의 결합 능력 감소, 골수의 적혈구 생산 기능 감소 등에 따라 빈혈 증세가 나타나기도 한다.
말라리아 원충에는 4가지 종류가 있으며 특히 3일 내지 4일 간격으로 주기적으로 열이 오르내리면 말라리아 감염을 의심할 수 있다. 말라리아 원충에 대한 인체의 감수성은 개인차가 크며, 일반적으로 성인보다 소아의 감수성이 크고 연속 감염되면 면역성이 증가되어 증세가 약하게 나타난다.
혈액 도말 검사를 하여 적혈구에 기생하는 말라리아 원충을 찾아내면 확진할 수 있고, 형광항체법이나 효소면역측정법 등과 같은 면역학적 방법으로도 진단 가능하다. 예방을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말라리아 유행여부를 사전에 파악하기 위한 감시조직이 구성되는 것이 좋으며 예방을 위해 함부로 약을 복용하는 것은 약제의 저항성만 증가되므로 조심하여야 한다. 모기에 물리지 않는 것이 최선의 예방법이므로 초저녁부터 새벽 사이에 유행지역에서 외부활동을 할 경우 긴소매와 긴바지 착용한다거나, 방충망, 모기약, 모기향 등을 사용하는 것이 좋고, 주변환경을 개선하여 모기가 서식할 수 없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치료제의 발전
까방뚜와 뻴르띠에가 키나 나무껍질에서 분리한 키니네가 말라리아 치료 효과를 지닌다는 것을 증명한 후 19세기에는 키니네가 유일한 말라리아 약제로 사용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 화학요법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처음 개가를 올린 것은 아스피린으로 유명한 독일의 바이어 회사였다.
바이어 회사에 근무하던 로엘은 1924년 12월 합성한 수많은 유도체중 카나리아 모델에서 키니네보다 60배나 강한 효과를 지니는 파마퀸(pamaquine)이라는 물질을 찾아낼 수 있었고, 다음해에 임상실험을 실시한 후 1927년에 플라스모퀸이라는 상품명으로 발매되었다. 그러나 지속적인 연구결과 파마퀸은 부작용이 심한 것이 드러나게 되었고, 간세포에 침입한 말라리아에 주로 효과를 지니는 것이 알려지게 되어 적혈구에 침입한 말라리아에 효과를 가지는 키니네와 복합치료를 실시하는 것이 좋은 결과를 가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연구팀은 또한 1930년 퀴나크린(quinacrine)을 개발하여 아타브린이라는 상품명으로 1932년부터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퀴나크린은 사용자의 피부를 황색으로 변하게 하는 부작용이 나타났으며, 로엘과 함께 일하던 키쿠트 등은 다른 퀴놀린 화합물인 존토퀸과 클로로퀸(chloroquine) 등을 개발하였다.
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키니네는 주로 인도네시아 자바 지역에서 생산되어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약 100년에 걸쳐 유럽인들의 아프리카 탐험이나 말라리아 만연지역에서 예방을 위해 사용되었으나 1942년 일본군이 자바 지역을 점령하자 유럽 국가들은 이미 알려진 합성제재를 생산하여 보급하는 한편 1930년대 말부터 새로운 합성제재를 찾기 위한 연구를 진행하였고, 1940년대에 들어서자 미국도 합성 항말라리아 제재를 찾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독일군 포로로부터 새로운 항말라리아제를 입수한 연합군은 미국에서 이 약을 분석한 결과 퀴나크린보다 성능이 우수한 클로로퀸을 알게 되어 전쟁이 끝난 후 미국에서 대량생산되기 시작하였으며, 효과는 좋으나 부작용이 심하여 사용하지 못하던 파마퀸의 유도체를 연구하여 아주 뛰어난 약제인 프리마퀸이 개발되어 현재가지 사용되고 있다. 또한 영국에서는 지금도 예방의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술폰아미드 계열의 프로구아닐을 개발하였다.
그러나 신약의 개발은 일단 말라리아에 감염된 환자들에게는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질병 예방의 차원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1950년대부터 말라리아 해결을 위해 모기를 박멸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보다 앞선 제 2차 세계대전 말기에 전세계적으로 발진티프스가 유행을 하여 전쟁터나 강제수용소, 피난촌 등에서 환자들이 속출하여 문제가 된 바 있는데 발진티프스는 이를 매개로 전파되는 질환이며, 이를 해결해 준 해결사는 스위스의 화학자 뮐러(Paul Herann M?ler, 1899~1965, 1948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였다. 뮐러는 1939년 각종 해충박멸에 탁월한 효과를 지닌 DDT(dichloro diphenyltrichloroethane)을 개발하여 농업 및 전염성 질환 해결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전쟁 말기에 이를 구제하여 발진티프스를 해결하는데도 큰 도움을 주었다.
말라리아 해결에 발벗고 나선 세계보건기구에서는 1955년부터 모기박멸 정책을 수립하였고, 이를 위해 DDT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DDT가 축적효과를 지니며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영원히 환경파괴 효과를 지닌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용이 중지되어 이 정책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그 때까지 가장 좋은 말라리아약이던 클로로퀸에 대해 내성을 가진 말라리아도 출현하기 시작하면서 인류와 말라리아는 밀고 밀리는 싸움을 지속하게 되었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미군들은 말라리아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었으며, 따라서 신약 개발에도 많은 힘을 쏟은 결과 1971년 메플로퀸이 개발되었고, 1972년 중국에서는 식물 추출물에서 분리한 아르테미시닌이 개발되는 등 말라리아 해결을 위한 인류의 노력은 20세기 전반에 걸쳐 계속되었다.
말라리아의 감소와 재창궐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전세계적으로 말리리아 환자는 감소추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좋은 치료약이 개발된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인류의 생활이 윤택해짐에 따라 건강상태가 호전되고, 환경에 대한 인류의 관심이 증가하면서 주변환경을 깨끗이 하는 생활습관이 전보다 나아진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원충을 때려잡는 것보다 매개체인 모기를 박멸하려는 시도가 요구되며, 이를 위한 노력들이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발행한 그림 6의 자료에도 말라리아 발생이 현저히 감소되어감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수천년간 인류와 함께 지구를 지배해 온 말라리아는 쉽게 물러가지 않았다. 힘써 개발해 놓은 약제에 대해 내성을 지니는 말라리아 원충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모기의 생태가 조금씩 변화해 가면서 환경에 더욱 더 잘 적응하는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이산화탄소 배출 증가에 따른 지구온난화 현상으로 지구온도가 증가함에 따라 예전에는 주로 아열대 및 열대 지방에 분포되어 있던 모기가 이제는 과거의 온대지방으로 그 분포범위를 넓혀가고 있으며, 이로 인해 말라리아 환자 발생지역도 점점 넓어져 가고 있다.
20세기에 엄청나게 진보된 의학은 두창을 박멸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다른 전염성 질환에는 작은 효과밖에 주지 못했고, 20세기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에이즈 바이러스나 에볼라 바이러스 등의 신종 질환과 함께 어느 정도 해결되어 가는 듯하던 질병들도 내성균 출현 등의 방법으로 다시 인류를 괴롭히기 시작하고 있는데 여기에 말라리아까지 합세하여 21세기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일이라 단순한 유행인지, 아니면 일전불사를 외치는 재창궐인지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말라리아는 20세기에 해결된 질병이 아니며 21세기에도 끊임없이 인류에게 위협적인 질환으로 남아 있으리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 나라의 말라리아
우리의 조상들은 정체 불명의 주기적인 열이 오르는 증세가 나타나는 경우에 “학질”, “돌림병(질병이 여러 사람에게 전파되어 돌아다닌다는 뜻에서 유래)”, “하루걸이” 등이라 하며 공포감을 가지고 있었고,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무렵 유행하는 질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현재 우리가 “말라리아”라고 하는 질병이다.
우리 나라 역사책에 말라리아로 보이는 질환이 처음 나타난 것은 고려 의종 때인 1152년이며, 여러 가지 역사문헌을 통해 추측해 볼 때 현재의 말라리아로 생각되는 질병이 수시로 유행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1886년 발행된 제중원 1차년도 보고서에는 제중원 창설 후 1년간 내원한 환자들을 분류한 내용중에 간헐성 발열 증세를 보인 풍토병 환자들중 삼일열이 171예, 사일열이 713예로 보고되어 있어서 이 중에서 상당수가 말라리아 환자일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증세를 보고 판단하는 방법 대신 혈액 속의 원충을 찾아내는 방법으로 진단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이와 같은 방법으로 처음 보고된 것은 1913년 일본인에 의해서였다. 이것은 삼일열 말라리아였고, 우리 나라에서는 현재까지 대부분 환자들이 삼일열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있으며, 사일열과 열대열도 가끔 발견되나 난형열은 아직 보고된 예가 없다. 이후 1920년대와 30년대에 크게 유행하였다가 40년대에는 감소하였으나 50년대에 다시 유행하였다.
사일열 말라리아는 1930년 충청남도 서산에서 처음 14예가 보고되었고, 1961년 보건사회부(현재의 보건복지부) 말라리아팀이 43예를 보고한 바 있으며, 열대열 말라리아도 1936년 서울에서 1예, 1959년 마약중독자 1404명 중 열대열원충 보유자 85명, 사일열 원충 보유자 16명을 검출하는 등 92예가 보고되고 있으나 대부분이 마약중독자인 점으로 보아 주사기를 통해 감염된 것으로 의심되고 있다.
1961년부터 보건사회부에서는 세계 보건기구와 공동으로 대대적인 항말라리아 사업을 전개하였다. 이에 따라 경기 북부와 동부, 경북 북부 지방을 제외하고는 1960년대 후반부터 말라리아 환자가 급속히 줄어들었고, 1975년 이후에는 거의 소멸되어 말라리아가 거의 근절되어 가는 듯했으나 매개모기인 중국얼룩날개모기(Anopheles sinensis)는 줄어들지 않고 있었으므로 재유행 가능성은 남아 있었다.
그러던 중 1993년 7월, 경기도 북부에서 근무하던 군인중에 삼일열 말라리아 환자가 발생하였다. 이 환자는 외국여행 경험이 없었으므로 감염원을 찾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1994년 5월과 6월, 역시 경기도 북부 휴전선 부근에서 환자가 발생하였고, 이 후 환자의 분포지역이 넓어지면서 1998년에는 3,932명, 1999년에는 약 10,000명의 환자가 발생하는 등 최근 급속히 퍼져나가고 있다.
1993년부터 1997년까지 발생한 환자들은 경기도 북부지역에서 휴전선을 따라 길다란 모양으로 분포하였고, 휴전선으로부터 10km 이내에 거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후방 지역에서 발생한 환자들도 대부분 최근 1년 이내에 휴전선 근처에서 국방의 의무를 마친 후 전역한 사람들로 판명되었다. 따라서 북한에서 말라리아가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다. 앞에서 기술한 대로 말라리아를 전파하는 신종모기가 북한 지역으로부터 휴전선을 넘어 오면서 휴전선 근처에서 환자들이 발생하기 시작하였고, 서서히 다시 토착화해 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 아닌지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에서도 한동안 잠잠하던 말라리아 발생이 90년대 들어 다시 증가하고 있으며, 남한으로부터 말라리아가 전파되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으나 1993년 이전에 북한이 세계보건기구에 클로로퀸 공급을 요청한 것으로 볼 때 그동안 말라리아가 박멸되지 않고 있다가 재유행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 재유행 6년만에 환자수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으며, 세계적인 재유행과도 맞아 떨어져 다시 근절시키기 위해서는 과거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으로 예상되므로 이제 국민 각자는 주거 환경 개선을 통해 모기 서식지를 일소하는 방법 등을 강구해야 할 때이다. 후진국병으로 간주되던 말라리아가 선진국을 목전에 둔 우리 나라에서 유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끼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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