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12/30(일)
양성판정을 확정받았다가 후에 음성판정을 받은 사람  

양성판정을 확정받았다가 후에 음성판정을 받은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국립보건원에서는 이 사실을 당사자에게 통보하지 않은 채 숨겼습니다.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정부와 과학자들은 무엇이 두려웠을까요?

법원 판결문

'원고는 피고(대한민국) 산하 국립보건원이 87.4.27. 원고에 대하여 실시한 에이즈 바이러스 항체검사에서 양성으로 판정되었다. 원고는 그 이 후 여러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겨 다니며, 술집 접대부, 유흥업소 종업원 등으로 종사하면서 피고 산하 보건소, 보건환경연구원, 국립보건소 등에서 정기적인 면역기능검사 및 12 회에 걸친 항체검사를 받았다. 전남 보건환경연구원, 제주 보건환경연구원, 국립보건원은 원고의 항체검사 결과 음성 판정이 나왔으나 검사를 의뢰한 기관에 대하여만 그 결과를 통보하였고, 감염자 본인인 원고에게는 이를 알려주지 아니하였다. 원고는 95.4.21. 무렵 한국방송공사에서 '추적60분'이라는 프로그램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원고의 혈액에 대한 항체검사에서 위와 같이 음성으로 판정된 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프롤로그

한 번 양성, 세번 음성 판정을 받았지만, 보건복지부의 은폐로 이 사실을 모른 채 윤락가를 전전해야 했던 어느 여인의 삶을 다른 책 [세상 끝에 선 여자]에서 프롤로그를 퍼왔습니다. 읽어보십시오. 소름끼치게 절망적인 한 여인의 삶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프롤로그를 쓴 기자놈은 아주 싸가지가 없는 자식이군요.


프롤로그


지난 1994년 7월, 언론에 일제히 보도됐던 광주의 '에이즈 접대부' 정민숙 씨(당시 33세). 당시 언론들은 정민숙 씨를 두고 '에이즈 양성반응 판정을 받은 30대 여자가 8년 동안 술집과 다방에서 접대부로 일하면서 수시로 성관계를 가진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고 보도해 사회적으로 적잖은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일부 언론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녀가 에이즈에 감염되고 나서 세상에 복수하기 위해 고의로 남성들과 성관계를 맺었다고까지 보도했다. 일약 정민숙 씨는 '에이즈 복수극'의 화려한 주인공으로 떠올랐다.


지난 91년 말 에이즈에 감염된 20대 여성이 복수극을 벌였다고 허위보도한 이른바 '『웅진여성』에이즈사건' 이후 불과 2여년 만에 발생한 에이즈 복수극이어서 더욱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또한 확인되지 않은 에이즈 복수극에 대한 유언비어-일부 에이즈 감염자가 사회에 복수하기 위해 조직적이고도 은밀하게 에이즈를 전파시키고 있다는-도 세간에 떠돌고 있는 실정이어서 '에이즈 목수극' 기사는 당시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고도 남았다.


아무튼 당시 언론이 만들어 낸 '에이즈 접대부' '에이즈 복수극'은 정씨를 파렴치한으로 몰아붙이기에는 너무도 그럴 듯한 대명사였다. 이에 힘입어 많은 사람들은 광주의 '에이즈 접대부' 정 모씨(당시 언론은 이니셜만 표기한 채 그 익명성을 이용, 정씨를 마구 난도질했다)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에 대한 적개심과 함께.


이후 정씨는 홍등가 주변에는 늘 있게 마련인 사채업자에게 진 빚을 갚지 못해 사기혐의로 구속(그녀의 에이즈 감염사실도 경찰에 구속되는 바람에 세상에 노출됐다). 6개월 간의 교도소 생활을 했다. 출감 뒤 정씨는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과연 그녀는 에이즈 접대부였나. 당시 언론의 보도대로 에이즈 복수극을 벌인 게 사실이었나.


사실이든 아니든간에 호들갑을 떨었던 언론보도만을 접하고서는 그녀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야말로 그녀는 베일에 가려진 여자였다. 따라서 그녀가 에이즈 복수극을 벌였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그녀의 삶이 그리 순탄치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그녀의 삶이 그리 순탄치 않았으리라는 사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에이즈에 감염된 데다 접대부 생활을 한 것 자체가 이를 입증하는 것이다.


정민숙 씨는 5·16 쿠데타로 정치적 혼돈 속에 빠져 있던 시기인 1962년에 태어나, 한창 산업화가 가속화됐던 70년대를 무용수로, 그리고 제법 자본주의가 뿌리내렸던 70년대를 넘어 80년대 중반까지 접대부 생활을 했다. 그야말로 그녀의 삶은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기자라면 누구나 당연히 그런 그녀에 대해 호기심을 가졌을 것이다. 정민숙 씨를 만나면 괜찮은 기사를 무는 것은 물론 특종까지도 터뜨릴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 마치 강태공이 낚싯줄을 던져놓고 월척을 기다리는 심정과도 같은.


그녀에 대한 추적은 여기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그녀를 만날 길이 막막했다. 6개월 정도 형을 살았다면 지난 95년 초에 출감했을 것은 뻔한 일. 이름조차 모르고 광주의 '에이즈 접대부' 정 모씨라고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수소문할 길 또한 없었다. 광주의 모든 보건소에다 그녀의 신상에 대해 의뢰하자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정 모씨가 누군지도 모를뿐더러 알고 있다 해도 알려줄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에이즈 관변단체에 문의해도 냉담한 반응뿐이었다. 그러던 중 지난 95년 7월, 자주 드나들던 한 에이즈 단체의 간부에게서 그녀를 찾을 수 있는 단서를 잡을 수 있었다.


그 간부는 소문과는 달리 에이즈 감염자들에 대해 대단히 냉소적인 시각을 갖고 있어 놀란 적이 있었는데 그의 그런 말투 속에서 정 모씨에 관한 정보가 흘러나왔다.


「에이즈 감염자이면서 국내 최초로 에이즈 퇴치운동을 한다는 김정수(가명)란 친구가 있지요. 그 친구 오래는 못 갈 겁니다. 쓸데없이 사람들을 불신하기나 하는 성미인데 그래서 일 제대로 할 수 있겠어요?」


그는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지난 94년 5월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감염경위와 앞으로 에이즈 퇴치운동을 하겠다고 밝힌 김정수 씨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김씨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은 그에 대해 심사가 뒤틀려 있기 때문이란 걸 나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주도하는 단체에 김씨가 들어와야 운영이 잘되는데 그가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정씨의 행방을 물어보면 어떤 소득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에이즈 감염자들을 모으고 있던 김씨에게 별로 달갑지 않게 생각하던 그가 말해서는 안 될 이야기가지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김정수 씨가 우리 단체로는 통 연락을 안 하기 때문에 정확히는 알 수 없어요. 그러나 십중팔구 그 여자(정씨)는 김씨와 함께 살고 있을 겁니다.」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에이즈 감염자끼리의 결혼! 이는 감동적인 뉴스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비판기사 못지않게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기사 또한 좋은 기사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에이즈라는 천형(天刑)을 선고받고서도 좌절하지 않고 결혼에 이르러 제2의 인생을 살아간다면 그것은 진흙 속에 핀 연꽃으로도 표현될 수 있지 않는가. 사소한 일로 절망한 나머지 자살하는 젊은이들도 적지 않은 현실에서 에이즈 감염자끼리의 결혼은 분명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될 만한 일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 상기된 표정으로 그 간부에게「그게 사실입니까? 믿어지지 않는데요?」하며 오히려 그의 다음 말을 기대했다. 그리고 그의 이어진 말은 정씨와 김씨의 동거는 확실한 정보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 여자가 교도소에 있을 때 김정수 씨가 자주 면회갔어요. 김씨가 언젠가 나에게 괜찮은 여자 있으면 결혼도 할 거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틀림없이 구애를 했을 겁니다. 의지할 데 없는 그 여자도 김씨의 청을 뿌리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거구요.」


그 간부도 이름을 몰라 우리는 정민숙 씨를 '정 모씨'나 '그 여자'로 부르고 있었다. 곧 나는 김정수 씨를 수소문했고 그가 신도림에서 에이즈 감염자 단체를 꾸려가고 있음을 확인했다. 김씨를 자연스럽게 만나 일반적인 것을 취재하는 척하다가 분위기가 잡히면 정씨 이야기를 꺼내야겠다고 취재계획을 세웠다. 일단 그에게 안부전화를 했다. 그전에도 몇 번인가 통화한 적이 있어 그와 자연스럽게 인사말을 나누었다. 그러나 정씨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며칠 뒤 그에게 팩스 한 장을 보냈다.


김정수 씨! 안녕하십니까.

어려움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에이즈 퇴치 운동을 벌이고 있는 김정수 씨에게 큰 박수를 보냅니다. 김정수 씨와 에이즈 감염자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다 할 도움을 주지 못해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름아니라 이번에 에이즈 특집기사를 다루기로 해서 도움을 얻고자 서신을 보내게 됐습니다. 에이즈 감염자들의 고통과 일반인들의 에이즈에 대한 무지, 그리고 귀 단체의 활동상에 대해 취재하고자 합니다. 어렵더라도 취재에 협조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김정수 시의 연락을 기다리겠습니다.


-95. 8. 30.


그러자 그는 팩스로 A4용지 2장 분량의 보도자료를 보내왔다.


세계 최초의 HIV 감염자 자치단체에서 워크숍 마련

주제: 가족의 태도반응에 따른 에이즈 감염자의 적응

일시: 1995년 9월 5일 오후 6시 30분

장소: 명동성당


정씨가 참석할 것은 뻔한 일이기에 나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무더위가 가시지 않아 더웠던 지난 95년 9월 5일 오후, 나는 명동성당으로 발길을 향했다.


김씨가 연단에 나와 에이즈 감염자 설문조사 결과보고를 하고 있었다. 그는 살아온 이력에 걸맞지 않게 제법 조리 있게 이야기를 전개했으며 언뜻 보기에 학구적인 인상도 풍겼다. 그러나 그의 발표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나는 정씨를 찾는데 혈안이 돼 있었기 때문이다. 행사장 입구 쪽에 서너 명의 여성들이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정씨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중 가장 미모가 뛰어난 여성을 눈여겨보았다. 미스코리아 뺨치는 여성들이 홍등가에 즐비하다는 것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그러니 만큼 홍등가에서 꽃다운 시절을 보낸 정씨라면 보통 미모는 아닐 거라는 판단이 섰다.


눈길이 간 여성은 단발머리에다 흰 면바지와 흰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키도 훤칠했고 이목구비도 뚜렷한 편이었다. 그녀는 팸플릿을 여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었다. 또 아는 사람들을 만나면 활달하게 웃었는데 하얗게 드러난 이가 인상적이었다. '기회가 오면 말을 걸어야지. 어떤 말을 먼저 꺼내야 할까'하고 속으로 궁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녀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연단 쪽으로 가 발표자들과 귓속말을 주고받는 등 바삐 움직여서 끼여들 틈이 없었다. 그녀에게 겨우 말을 붙인 건 워크숍이 끝나고 막 다과회가 벌어질 때였다.


「저…혹시 광주가 고향 아니십니까?」

그 다음에는 '시간 있으면 차 한잔 할 수 있겠습니까?'였으나 그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첫말에 그녀가 「아닌데요」하며 부드럽지만 강하게 부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총총히 사라졌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그 여성은 정씨가 아니고 에이즈 감염자들을 돕는 수녀였다. 곧 낭패감이 들었다. 잘못 짚은 것인지 아니면 정씨가 그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지 않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김정수 씨와 악수를 하면서 성의없이 「오늘 발표 대단한데요」라고만 말했을 뿐이었다. 그에게 직접 정씨의 행방에 대해 물어보았다간 영원히 그녀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에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주최측에서 나눠준 두툼한 워크숍 자료를 들춰보았다. 순간 정씨로 보이는 여성의 수기가 실려 있었다. 자세히 읽어보니 정씨임에 틀림없었다.


지난 8년간, 전 국내 에이즈 감염여성 1호라는 우습지도 않은 이름으로 살아왔습니다. 1987년 3월, 26세의 나이로 광주 광산보건소에서 에이즈 감염자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전 긴 잠속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악몽에 시달리며 꿈속을 헤맸습니다. ……7년 간의 외로운 방황 속에 저의 주위를 맴돈 건 보건소 직원과 주사바늘 그리고 술뿐이었습니다. 때때로 미치도록 가족이 그립고 고통스럽도록 외로운 밤이 오면 전 술을 마셔댔습니다. 내일이 오지 않길 빌며, 이제는 이 악몽에서 깨어나길 바라며 술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술김에 가족들에게 전화해서 심한 욕설을 퍼붓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욕설을 퍼붓는 제 마음은 언제나 이렇게 외쳤습니다.

엄마, 도와주세요! 언니, 도와주세요! 전 너무 힘들어요. 제발!

그런 일이 있는 날이면 전 짐승처럼 울부짖다 잠이 들곤 했습니다. 내일이 없길 빌며.

……


2장 분량의 그 수기는 절규로 메아리쳤으며 그녀의 체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녀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 수 있는 신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수기는 그녀에 대한 궁금증을 더더욱 증폭시켰다.


다시 취재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정면돌파를 할 것인지 우회적으로 접근을 할 것인지부터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정면돌파할 경우 자칫하면 김정수 씨를 비롯 함께 생활하고 있는 에이즈 감염자들에게 불신감이나 불안감을 초래해 아예 접근 자체가 원천봉쇄될 우려가 있었다. 그렇다고 우회접근은 너무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되기 때문에 이 또한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후자를 택하는 것 이외의 다른 방법은 없었다. 나는 다시 김정수 씨에게 전화를 했다.


「행사를 보고 나서 깜짝 놀랐습니다. 어디서 그런 저력이 나오는지. 아무튼 대단합니다.」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랫동안 열심히 준비한다고는 했는데 부족한 게 너무 많았습니다. 앞으로 더 좋은 행사를 마련해 에이즈 퇴치운동에 획기적인 계기가 되도록 할 테니 많이 도와주십시오.」.


그는 내 칭찬 한마디에 신명이 나 있었다. 그래서 슬쩍 「광주의 정씨도 수기까지 발표했던데 잘 계십니까」하고 물어보았다. 내 질문에 그도 엉겹결에 「예, 여기 잘 있습니다」하고 대답해 놓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곧 말을 바꿨다.


「이번주 안에 한번 뵙고 싶습니다. 고생도 하셨는데 소주나 한잔 했으면 해서요. 그리고 저번에 취재하고자 했던 것도 한번 만나 뵙고 상의도 좀 드리고….」


그는 「좋습니다」라며 흔쾌히 대답했다.


며칠 뒤 다시 전화를 했다. 제법 날씨가 차가워질 때였다. 그와 오후 4시 30분에 신도림 전철역 맞은편 D학원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나는 약속시간보다 먼저 나가 기다렸는데 30분이 지나서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호출도 없었다. 그래서 전화를 했더니 허스키한 목소리의 여성이 「급한 일이 있어서 나가셨습니다. 오늘 만나기로 약속한 분이죠? 다시 연락드리신다고 했으니까 그리 아세요」하고 말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1주일에 한 번 꼴로 전화를 계속 했는데 김정수 씨가 없다는 말만 들었다. 매번 메모를 남겼는데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가 고의로 피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눈치 빠른 김정수 씨가 내가 정씨를 찾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것으로 단정할 수 밖에 없었다.


해를 넘겨 96년 초에도 몇 번인가 전화를 했는데 연결조차 되지 않았다. 전화번호를 아예 바꾼 모양이었다. 3월쯤 한 에이즈 단체의 사무장에게 새로 개설된 전화번호를 알아내 다시 전화를 했다. 그런데 예전의 그 허스키한 목소리의 여성이 또 전화를 받았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심정으로 「광주의 정씨 맞지요? 모든 걸 떠나 한번 만나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나누고 싶은데 시간 좀 내주세요」하고 말했다. 그녀는 얼른 대답을 못하고 연신 「누군신데요? 누구세요?」라고만 되물었다. 그녀라는 증거였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그리고 갈 테니 오후에 만납시다」하고 만날 것을 재촉했다. 그녀는 「기자들은 믿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도 뭔가 여운을 남겼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기사를 쓰고 안 쓰고를 떠나 인간적으로 만나서 이것 저것 이야기하고 싶으니 부담갖지 말고 일단 만납시다」하고 계속 그녀를 설득했다. 나의 집요한 설득에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러면 커피난 한잔 하자고 했다.


이렇게 해서 그녀를 대면한 건 96년 3월 5일 오후. 신도림동 신도초등하교 못 미처 어느 지하다방에서였다. 사진기자와 함께 30분 전에 나가 정씨 몰래 사진 찍을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그녀를 기다렸다. 그녀는 약속시간에 맞춰 나왔다. 암청색 반바지에 검정색 스타킹을 신고 자주색 잠바를 걸친 그녀는 언뜻 보아도 미모가 뛰어남을 알 수 있었다. 훤칠한 키와 긴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기쁩니다. 진작 만났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저 같은 사람을 만나서 좋을 게 뭐가 있나요? 요즘엔 정말 사는 게 힘들어요. 아시죠? 김정수 씨가 후원회비를 갖고 달아난 거….」


에이즈 감염자들의 자치단체인 '희망나눔터'의 회장을 맡고 있던 김씨가 어는 날 후원회비와 통장, 후원회 명단 등을 들고 도주한 사실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시는 한창 힘들 때였다. 그녀를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알고 보면 그일 때문이었다.


그동안 정씨를 만날 수 없었던 것은 알고 보니 김씨가 그녀와 동거생활을 하고 있었던 데다 일에 대한 독점욕이 강했던데 있었다. 모든 일을 혼자서만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가 떠나고 난 뒤 정씨를 만나게 돼 에이즈 감염자끼리의 결혼이라는 미담기사는 증발된 셈이었지만 그녀에게서 '에이즈 복수극'의 진실이나 사연 많던 지난 삶을 들어볼 수 있으리란 생각으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에이즈 복수극의 진실을 알고 싶은데 말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단 오보는 한 줄도 쓰지 않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필요하다면 각서까지 쓰겠습니다.」

「글쎄요. 지금은 밝힐 때가 아닌 것 같아서….」

「미국의 프로농구스타 매직 존슨도 에이즈 감염자이면서 공개적으로 활동하는 마당에 에이즈 퇴치운동을 벌이는 당신이 지난 일을 공개한다고 해서 두려울 게 뭐가 있습니까?」

그녀는 허공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뭔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그러나 여기는 제가 사는 곳이기 때문에 장소를 옮겨 인터뷰했으면 좋겠는데요.」


그녀의 반응은 의외였다. 이렇다 할 토도 달지 않고 취재를 승낙하는 그련가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승낙을 한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쉽게 일이 풀릴 것이란 예감이 들어 솔직히 실토를 했다. 「당신 모습을 사진기자가 촬영하고 있었습니다. 저쪽을 보세요. 이 점은 사과드릴게요」하며 사진기자를 불렀다.


그녀는 깜짝 놀라는 눈치였으나 그냥 웃고 넘어갔다.

자리를 영등포의 한 음식점으로 옮겨 마주앉은 시각은 오후 6시쯤. 소주를 주고받으며 취재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넣고 난 다음 그녀는 「친구처럼 생각하시고 있는 그대로 써주세요」라고 주문 아닌 주문을 했다. 그녀의 언론과의 첫 인터뷰는 이렇게 시작됐다.


그녀는 먼저 자신의 본명은 정민숙. 가명은 서현주라고 소개했다. 정 모씨가 정민숙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살아온 삶을 거침없이 내쏟았다. 지지리도 가난했던 어린 시절, 11살 때 서울로 입양돼 수양할아버지와 삼촌에게 성폭행당한 일, 미8군 무용수 생활, 폭력에 시달리다가 끝내 파국을 맞은 결혼생활, 광주 송정리에서의 접대부 생활, 에이즈 감염판정, 어떤 남성과의 사랑, 교도소 생활….


그리고 그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도 털어놓았다. 자신이 26세 때인 지난 87년, 광주보건소에서 에이즈 양성반응 판정을 받았으나 이후 공신력 있는 기관으로부터 3차례나 음성판정을 받아 당시의 에이즈 검진이 오진이었다는 주장이었다. 87년에 에이즈 양성판정을 받고 에이즈에 감염된 줄 알고 에이즈 감염자와 동거생활에 들어가 뒤늦게 에이즈에 감염됐다는 그녀의 주장은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87년 광주 광산보건소에서 통보한 에이즈 양성반응 판정자료와 그 이후 공인기관에서 음성반응 판정을 내린 자료를 갖고 있습니까?」하고 묻자 그녀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낚시방울이 크게 흔들리는 듯한 느낌이 온몸에 전해졌다. 이는 분명 범상한 기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현재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중이므로 이 기사만은 당분간 보류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의 에이즈 검진 오진 이야기는 외부로 처음 알려지는 것이었다. 어찌 됐든 우리 나라에서는 에이즈 감염자의 얼굴과 본명, 사연 등을 최초로 언론에 등장시킬 수 있는 개가(?)를 올릴 것인데 더 이상 욕심을 내면 정작 큰 기사는 쓸 수 없을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녀가 자료를 내놓지 않으면 기사화가 불가능해 그렇게 하자고 했다. 결국 그녀의 지난 삶과 에이즈 복수극의 진실만 지면을 타게 되었다.


그러나 보충취재와 오진기사를 쓰기 위해 정씨를 여러 전 만나면서 그녀가 범상한 여자가 아님을 느꼈다. 기사를 써야겠다는 욕심으로 설득하기에 급급했던 게 사실이었지만 그런 속에서 느껴진 그녀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고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담백함과 너그러움, 그리고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함. 온갖 미사여구로 자신을 치장하기 좋아하는 요즘 여성들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저는 한글을 몰라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해서 아직도 더듬거려요. 틈틈이 한글 공부를 하긴 하는데 머리가 굳어선지 쉽게 들어오질 않네요.」


사실 이런 그녀의 솔직담백한 모습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아픈 과거를 이야기하면서 숨기거나 얼버무리는 것 없이 죄다 털어놓았다. 그렇다고 과장되게 말하는 법도 없었다. 물어보는 말에 충실하게 답하기고 했고,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아직까지 한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솔직히 말했다. 가난해서 초등학교조차 제대로 나오질 못했다고 하면 될 것을 「저는 젊은 여자인데도 한글을 잘 몰라요. 그래서 서울에서 돌아다니려면 여간 불편하지 않아요」라고 말하기가지 했다.


그러나 그녀는 사랑했던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대목에 서는 서서히 자세를 흩뜨렸다. 그 남성과 헤어진 지 7여 년. 헤어진 시간이 꽤 흐른 데다 35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그녀는 그 남성과의 추억을 말하는 순간 어깨가 들썩거렸고 뜨거운 눈물을 하염없이 쏟아냈다. 쉽게 만나 쉽게 헤어지는 요즈음의 젊은 남녀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찾기란 쉽지 않을 듯 싶다. 그것도 오래 전에 헤어진 애인을 잊지 못해 눈물까지 흘리는 모습이란.


하루는 신도림동의 한 다방에서 그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 함께 걸어나오는데 초등학교 오륙학년 정도 돼 보이는 여자아이가 「이모, 어디 갔다와? 보고 싶어서 찾았는데」하며 정씨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그녀는 여자아이를 불쓱 안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길거리에서 반갑게 포옹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흡사 모녀지간처럼 보였다. 나는 궁금해서 그녀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우리 동네 아이인데요, 슈퍼마켓이나 길에서 자주 만나 함께 떡볶이도 먹고 하면서 친해졌어요. 동네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요. 친구처럼 대해 주니까 자기 부모에게도 말하지 않는 고민거리를 내게 털어놓기도 해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 마치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또한 동네 어른들과도 친하게 지내는 모양이었다. 슈퍼마켓이나 다방 개업식에 참석해 달라는 연락을 받는 걸 보면 동네의 이런저런 행사에 참석해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이처럼 정씨는 정이 많은 여자였다.


그녀의 삶 자체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비록 접대부로 살아온 그녀지만, 그로 인해 에이즈라는 천형을 선고받은 그녀지만, 여느 여성 못지않게 순수하게 살아온 이 땅의 밑바닥 여성을 대표하는 그런 여성. 늘 세상의 냉대와 천시를 받아왔지만 오히려 세상을 따스하게 바라보고 따스하게 감싸안는 그런 여성.


이 에이즈 접대부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오히려 정씨의 지난 삶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우리는 그녀를 따스하게 감싸안고 덕지덕지 묻은 자신들의 때를 벗겨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녀의 과거 속으로, 파란만장했던 삶 속으로 천천히, 그러나 열정을 갖고 걸어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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