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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아기 임상실험에 대한 비판 또 다른 판바꾸기에 대하여 <공정선거 대구경북시민연대 칼럼 10> 김임미 (영남대 강사) 며칠 남지 않은 총선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한 가운데 또 다시 가슴 뜨끔한 소식들이 나라 안팎에서 들려온다. 그 중에서도 실험실의 쥐보다 못한 일을 당한 가난하고 부모없는 유색 어린아이들의 사진을 보면서 눈앞이 하얘지는 분노와 절망을 떨쳐버릴 수 없다. 미국 뉴욕시의 에이즈 치료 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흑인이나 히스패닉 계통의 고아들이 지난 95년부터 영국의 글락소(Glaxo), 미국의 화이저(Pfizer)등과 같은 제약회사의 지원 아래 행해진 36가지의 신약 임상 실험에 100명이상 동원되었다는 설명이다. 새로운 에이즈 치료제의 안전성과 내성을 시험하는 실험의 대상이 되어 유전자 변형, 장기 손상, 골수 파손, 뇌 손상, 심각한 피부병을 일으키는 독성 물질을 강제로 투여당하고, 이를 거부하는 아이들에게는 외과 수술을 통해 위와 장에 직접 투여하는 살인적 인체 실험이 에이즈 연구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거대 다국적 제약회사가 보여주는 관행적인 반생명적, 파시스트적 행태가 새삼스러울 것도 없으나, 막상 온 얼굴과 몸이 열꽃으로 뒤덮이고 배에 구멍이 난 아이들을 보니 걷잡을 수 없는 아찔함으로 가슴이 먹먹하다.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약물을 거부하는 아이들을 강제로 죽음으로 내모는 소위 전문가들의 만행은 오늘날의 의학, 과학, 기술이라는 것이 얼마나 인간 자체를 간단하게 무시하는 광기에 찬 맹신인가를 돌이켜보게 한다. 그러면서도 사진을 보는 사람들이면 누구나가 느끼게 될 이 분노와 절망의 원인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실험이 단지 어리게는 생후 3개월에 이르는 어린 아이들에게 행해지기 때문인가? 가난하고 돌봐 줄 사람 없는 특정 인종을 실험의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인가? 가디언(Guardian) 지(紙)에서 소개하고 있듯이, 최신 신약을 제공받는 것과 실험용이 되는 것은 차이가 있는 것이고, 에이즈에 대한 정확한 진단 자체가 불가능한 현 상황에서 에이즈 치료제의 독성과 부작용이 건강한 아이들에게까지 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아이들과 동물들을 포함해서 다른 누군가는 끊임없이 자본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다국적 제약 산업의 실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물론 오늘날 가장 중요한 사회 개혁의 과제는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만이 희생을 강요당하는 사회 구조의 변혁일 것이다. 허무주의나 양비론으로는 현실적인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음 또한 분명하다. 그러나 그저 실험 대상을 달리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면 보다 공평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좀 더 근본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요컨대 이 문제는 실험 대상 선정의 합리성이나 공평성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실험 대상의 희생을 필요악으로 치부하는 의약 산업 구조 자체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의약품 실험 대상의 범위와 목적을 명시하는 법과 규칙을 시급히 제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생명과 질병에 대한 우리의 철학과 윤리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질병 치료와 의약품 소비의 구조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 부작용만을 개선해 나가는 것은 힘없는 자의 희생을 전제조건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삶 속에서 가장 진지하고 엄숙해야 할 질병과 죽음의 상황에서조차도 얼마나 소비주의에 의존하고 있는가? 질병의 근본적인 원인을 찾지 않고 문제의 최말단에 있는 증상만을 손쉽게 고치려는 사고는 소비주의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질병을 의사와 약품에 간단하게 내맡기는 무책임한 사고방식이 지배적인 한, 실험실의 마루따는 끊임없이 양산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몸과 정신을 전문가에게만 독점적으로 맡기게 될 수밖에 없는 제도에 순응하는 한 돈 있는 자만이 목숨을 보전하는 반생명적이고 폭력적인 치료 체계는 변화될 이유가 없다. 같은 맥락에서 이러한 순응주의로는 아시아에서만 한 해 동안 교통사고 사망자가 천만 명에 이르는 현실에 아무런 감각을 가질 수 없고, 도대체가 사멸하지 않는 정치권의 수구세력들에 대한 막연한 지지와 향수를 극복할 길이 없다. 갓난 아기까지도 실험용으로 이용하고 죽음으로 몰고 가서 얻게 되는 만병통치약은 이미 만병통치약의 효능을 상실했을 뿐더러, 만인에게 똑같이 소중한 생명까지도 자본의 논리와 권력 관계로 내몰 뿐이다. 결국 또 다시 스스로의 삶에 대한 책임 의식과 자존심을 회복하고 우리들 사고의 판을 바꿀 용기가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고통에 입 벌리고 있는 아기의 사진을 보면서 저 아이를 저렇게 만든 것이 결국 우리 자신이라는 엄연한 사실 때문에 이토록 치가 떨리는 것은 혹시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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