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바라 (bompt@hanmail.net)
2002/1/31(목) |
아래 자본주의의 붕괴에 덧붙여 ... 다윈의 진화론이 역사의 발전에서 엄청난 진보였던 것은 틀림없으나, 진화론이 가져 온 심각한 폐해 중 하나는 인간의 사회를 적자생존의 역사로 바꿔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우생학이며, 아일니컬하게도 현재 미국의 부시 정권이 에이즈에 대해 갖는 관점이 바로 우생학이라는 것입니다. 1983년 사회생물학으로 이름을 바꾼 우생학의 뿌리는 멜더스의 [인구론]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인구론은 '증가하는 인구로 인해 범죄가 증가하고 식량이 줄어들 것이다'라는 당시 중산계급의 이해관계를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거짓말로써, '에이즈를 고발한다' 코너에 있는 저의 에세이 '에이즈 예방 활동은 당장 중단되어야 한다!'에서 잠깐 다룬 바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다윈이 가장 즐겨 읽은 책이 [인구론]이었으며, 실제 그는 [인구론]에서 진화론의 모티브를 얻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역사를 적자생존으로 보는 관점은 합리화의 편리한 도구로 이용되어 왔을 뿐입니다. '이 세상은 처음부터 인간 대 인간의 투쟁의 역사였어. 인간의 속성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거야. 그게 자연의 법칙이건든' : 이 생각은 영국의 정치철학자 홉스에 의해 구체화됩니다. 그의 저서 [리바이어던]은 인간의 역사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보고, 결국 인간의 자기보존에 대한 이기심을 억제하고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군주의 명령에 복종하는 신민, 즉 절대권력에 의해 유지되는 정의와 자유가 필요하다고 결론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속성(혹은 본성)이 있을까요? 인간은 원래 이기적인가요? 태생적으로 인간은 양면적일 수밖에 없을까요? 이 주제에 대한 해답은 의외의 장소에서 아주 간단히 찾을 수 있습니다. 인디언들을 보지요. 그들은 경쟁을 안 합니다. 사실 인디언 말에는 '경쟁'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에스키모(이 뜻은 '날고기를 먹는 사람들'로써 서구의 편견이 있는 단어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이글루'라고 말합니다.)인들은 전쟁을 안 합니다. 그들 사회에는 '전쟁'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왜 이들은 오늘날 사회에서 가장 만연해 있는 경쟁과 전쟁을 하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경제적 토대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은 경쟁이고, 이 메커니즘은 전쟁을 통해 유지됩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시대 이전에는 오늘날 절대적으로 숭배하는 가치가 있었을까요? 잠깐 have라는 단어를 살펴봅시다. 소유격인 have는 16세기 초기 부르조아 계급이 태동할 때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당시 도시 사회의 상인계층을 이루고 있던 자본가들에게 '이윤을 갖다'는 생존과 관련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때 고작 2-3개에 지나지 않던 '갖다'는 자본주의 사회가 태동한 이후 모든 맥락에 사용되고 있으며, 심지어 '사랑을 갖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표현이 아닙니다. 인간을 대상화하고, 사랑의 감정을 물질화하는 자본주의의 속성을 의미합니다. 물론, 자본주의 이전에 '사랑은 갖다'가 아니라 '공유하다'였습니다. 사랑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고 베품의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양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 사회 혹은 그 시대의 경제적 토대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연의 법칙입니다. 인간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사회 및 경제적 발전과 함께 진화해나간다는 그것입니다. 우리 시대는 에이즈의 사회입니다. 그리고 착취의 시대입니다. 인간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변화'이며, 그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이론이나 주의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자신을 규정한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에이즈 시대가 낳은 비극입니다. 후대의 사가들이 볼 때조차 끔찍할 수밖에 없는 이 절망을 우리는 한 몸에 안고 살고 있습니다. 이 지옥을 끝장내는 것은 변화입니다. 그 변화는 그 자신을 변화시킬 것이고, 무엇보다 사회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즐거운 하루가 되십시오. 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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